호프 자런(48)은 미국의 식물학자다. 허구한 날 실험실에 틀어박혀 ‘엄청나게 많은 이파리를 들여다보는 것이 직업’인 사람이다. 내로라하는 과학상을 수차례 수상했고 지난해에는 타임이 선정한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도 올랐다. 그가 왜 식물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는지, 어쩌다 과학자가 됐는지 책 속 내용을 재구성해 문답(問答)을 만든다면 다음과 같다.
-한때 하와이에 사셨던 걸로 압니다. 왜 바다가 아닌 식물을 연구한 건가요?
“육지에는 바다보다 600배 많은 생명체가 삽니다. 미국 서부 보호림에만 나무 800억 그루가 있어요. 이 숫자를 알고 나니 식물 말고 다른 것은 보이지 않더군요.”
-대학에서 처음에는 문학을 전공하셨는데, 왜 과학으로 진로를 바꿨나요?
“과학은 아직은 해결이 가능한 문제를 다루더군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미래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지 연구하는 학문이 과학입니다. 과학은 제게 무엇을 발견하는 행복이야말로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레시피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죠.”
-사람과 식물이 닮은 부분이 있다면 뭔가요?
“식물은 우리와 달라요. 저는 수십 년 동안 식물을 연구한 뒤 깨달았어요. 식물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공통점이 있긴 합니다. 빛을 향해 자란다는 거죠.”
마지막 답변, 사람도 빛을 향해 자란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이 책 ‘랩걸’에 녹아 있다. 자런은 전력을 다해 꿈의 빛을 좇은 학자다. 책은 신비로운 식물 이야기 위에 그의 인생 스토리를 포갠다. ‘뿌리와 이파리’→‘나무와 옹이’→‘꽃과 열매’라는 제목의 챕터를 차례로 읽은 뒤 책장을 덮으면 과학이라는 외길을 달려온 그의 삶 전체가 한 그루 나무로 거듭나 우리 곁에 선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비중 있게 다뤄지는 내용은 실험실에서의 삶이다. 그는 실험실을 ‘내가 진짜 나일 수 있는 장소’ ‘가장 친한 친구와 노는 곳’이라고 정의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내 실험실은 교회와 같다. 그곳에서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곤 하기 때문이다. 내가 들어갈 때 나를 반기는 기계음은 교회로 신도들을 이끄는 찬송가와 같다. …그곳에는 침묵이 있고, 음악이 있다.’
과학의 세계에 깊숙이 빠져든 건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때였다. 연구 주제는 팽나무 씨앗 화석에서 광물질을 채취해 빙하기 여름 기온을 추정하는 것. 그는 어느 날 새벽, 아무도 없던 실험실에서 원하던 결과를 손에 쥔다. 진정한 과학자로 거듭난 순간이었다. ‘우주가 나만을 위해 정해놓은 작은 비밀을 잠깐이나마 손에 쥐고 있었다는, 그 온몸을 압도하는 달콤함은 아무도 앗아갈 수 없었다.’
‘과학하는 여자’로 살면서 겪은 차별과 편견의 스토리도 전한다. 임신 출산 육아를 경험하며 느낀 희로애락의 감정을 담았고, 나무와 숲의 가치도 역설한다.
지난해 미국 뉴욕타임스는 ‘랩걸’을 소개하면서 스티븐 제이 굴드(1941∼2002)나 올리버 색스(1933∼2015)의 저작과 비교했다. 과학 분야 저술가로서로 자런이 이들 못지않은 필력을 갖췄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책을 읽노라면 곳곳에 반짝이는 문장이 많아 자주 밑줄을 긋게 된다. 마음 같아서는 이 책에 담긴 모든 문장을 옮기는 것으로 기사를 갈음하고 싶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책과 길] 사람은 빛을 향해 자란다, 나무가 그렇듯
입력 2017-02-24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