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남 암살 사건을 수사 중인 말레이시아 경찰에 따르면 이번 사건에 연루된 북한 국적자는 모두 8명이며, 이들 중 외교관과 고려항공 직원도 포함됐다. 또 암살을 실행에 옮긴 동남아 여성 2명은 독극물을 손에 묻혀 김정남을 살해한 것으로 드러났다. 탄 스리 칼리드 아부바카르 말레이시아 경찰청장은 22일 쿠알라룸푸르 경찰청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김정남 암살 사건의 의문을 밝힐 새로운 사실들을 공개했다.
경찰의 중간 수사 결과 발표를 종합하면 북한 정부가 단순한 배후를 넘어 김정남 암살 사건에 조직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경찰은 주말레이시아 북한대사관 2등서기관 현광송(44)과 고려항공 직원 김욱일(37)이 이번 사건에 연루됐다고 설명했다. 칼리드 청장은 이들의 역할에 대해선 함구하면서 “말레이시아 경찰은 두 사람에게 수사 협조를 요구할 이유와 근거가 있다”고 강조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말레이시아 고위 정보 당국자를 인용해 “현광송이 암살을 총감독하고 북한대사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맡았다. 현재 현광송과 김욱일은 북한대사관에 숨어 있다”고 보도했다. 외교가에서는 현광송이 북한 해외공관에서 신분을 숨긴 채 정보수집 활동을 하는 보위성 소속 ‘블랙요원’ 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김정남 암살 사건에 다수의 북한 국적자가 개입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앞으로 북한 당국과 사건의 직접적인 연관관계를 규명하는 데 수사력이 집중될 전망이다. 다만 북한이 이들에 대한 경찰의 수사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말레이시아 당국은 강제구인과 체포영장 발부를 거론하며 북한을 거세게 압박하고 있다. 칼리드 청장은 ‘북한 공작원이 배후냐’는 질문에는 “아직 수사 중인 사안”이라고 답했다.
베일에 싸여 있던 암살 수법도 드러났다. 칼리드 청장은 베트남 국적 도안 티 흐엉(29)과 인도네시아인 시티 아이샤(25)가 ‘맨손(bare hands)’으로 김정남 얼굴에 독극물을 문질렀다고 설명했다. 기존에는 여성들이 독극물이 묻은 헝겊, 장갑 또는 독극물 스프레이로 김정남을 살해했을 것으로 추정됐다. 여전히 성분이 확인되지 않은 이 독극물은 한 북한 국적 용의자가 여성들 손에 발라준 것으로 조사됐다.
칼리드 청장은 “몰래카메라를 찍는 줄 알았다”는 이 여성 용의자들의 진술은 사실이 아니며 범행 전 수차례 예행연습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CCTV에 이들이 두 손을 들고 화장실 쪽으로 가는 모습이 잡혔다. 범행 후 손을 씻은 것으로 봐서 독극물이 손에 묻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렇듯 경찰은 김정남 사인이 독살인 것을 사실상 인정했다. 전날 말레이시아 보건 당국은 “사인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칼리드 청장은 김정남을 여권상 이름 ‘김철’이라고 지칭하며 북한대사관에 신원 확인용 유전자(DNA) 표본을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고 설명했다. 김정남과 김철이 전혀 다른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북한대사관이 이에 응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이에 북한대사관은 같은 날 오후 성명을 내고 “사건이 발생한 지 10일이 지났지만 말레이시아 경찰은 체포한 용의자들로부터 어떤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여성 용의자가 손으로 피해자의 얼굴을 문질렀다면 여성들은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느냐”고 반박했다. 쿠알라룸푸르=신훈 기자 zorba@kmib.co.kr
北 국적자 8명… 배후 넘어 국가차원 개입 혐의
입력 2017-02-23 00:00 수정 2017-02-23 1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