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팀이나 대학팀은커녕, 변변한 리그도 하나 없다. 오직 단 한 팀이 있는데 그게 바로 국가대표팀이다.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 이야기다. 불모지나 다름없던 여자 아이스하키가 열악한 환경을 열정으로 극복해내며 본격적인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4득점 242실점’에서 ‘20득점 4실점’으로
지난 18일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 쓰키사무 체육관에서 열린 2017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태국과의 풀리그 첫 경기. 우리 대표팀(세계랭킹 23위)은 태국을 20대 0으로 완파하고 동계아시안게임 사상 최초로 승리의 감격을 누렸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대표팀은 20일 강력한 대회 우승후보 일본(세계랭킹 7위)과의 2차전에서 0대 3으로 패했지만 선전했다. 21일에는 대회 3연패를 노리는 카자흐스탄(세계랭킹 18위)과의 3차전에서 0대 1로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아직은 패가 승보다 많지만 역대 성적을 보면 천지개벽 수준의 실력향상이다. 한국은 1999년부터 2011년까지 4차례 동계아시안게임에 나서 15전 전패를 당했다. 4골을 넣는 동안 실점은 무려 242점. 경기당 평균 16점을 내줬다. 동네북 신세였던 대표팀은 이제 아시아 강팀들을 위협하는 신흥 세력으로 떠올랐다. 도대체 우리 여자 아이스하키팀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세대교체 성공과 평창동계올림픽 동기부여
먼저 유망주들의 대표팀 가세로 인한 세대교체가 큰 힘이 됐다. 이번 대표팀에는 김희원 이은지 최유정 엄수연 등 2000∼2001년생의 어린 선수들이 대거 합류했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스틱을 잡아 기본기와 개인기가 좋은데다 열정도 상당하다.
입단할 팀이 없는 상황에서 중학생 때부터 대표팀 테스트를 통해 태릉선수촌에 입성했다. 이후 2∼3년 훈련을 통해 정식 대표팀 선수가 됐다. 동갑내기 유망주였던 박종아(21)와 박예은은 2013년 대한아이스하키협회 추천으로 캐나다로 유학을 떠났고, 이젠 어엿한 대표팀 주축 선수로 성장했다. 대표팀 내부에서는 선후배간 선의의 경쟁이 생기면서 기량 동반상승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도 확실한 동기부여가 됐다. 지난해 4월에는 여자 아이스하키 세계선수권 디비전 2 그룹 A(4부리그) 준우승을 차지한 뒤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선수들은 평창올림픽의 전초전 성격인 아시안게임을 통해 전력을 가다듬고 한 단계 성장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똘똘 뭉쳤다. 미국 프린스턴대 공격수로 활약했던 캐나다 동포선수 캐롤라인 박(28·한국명 박은정)은 평창올림픽에 나서고자 2015년 귀화해 대표팀 전력에 힘을 보태고 있다.
또한 대표팀은 2014년부터 연 2회 미국 미네소타와 유럽 등 아이스하키 강국에서 전지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해외 지도자들로부터 선진기술을 전수받고, 강팀들과 실전 경험을 꾸준히 쌓고 있다. 최근에는 장비 매니저·전담 트레이너 등 대표팀 스태프까지 충원돼 선수들은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됐다.
골리 신소정의 활약
2003년부터 대표팀에 합류한 골리 신소정(27·뉴욕 리베터스)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대한아이스하키협회 관계자는 22일 “신소정은 대표팀 전력의 70%를 차지하는 월드클래스 선수다. 국제무대 경험이 많아 대표팀에서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신소정은 2013년 캐나다 대학 1부리그의 세인트 프랜시스 자비에르 대학교에 편입해 3시즌 동안 경기당 평균 1.46실점 세이브 성공률 94.4%를 기록했다. 올 시즌에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프로여자아이스하키리그(NWHL)에 진출했다. 신소정은 이번 아시안게임 3경기에서 69개의 유효 슈팅 중 단 4골만 내주는 등 선방 쇼를 펼치고 있다.
협회 관계자는 “여자 아이스하키에 대한 투자와 선수들의 의지, 3∼4년간의 실전경험 등이 축적돼 좋은 결과를 낳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 23일 중국, 25일 홍콩과 4·5차전을 앞두고 있다. 일본(3승)과 중국(2승1패)이 현재 1, 2위다. 한국은 1승2패로 카자흐스탄과 승패가 같지만 승자승 원칙에서 밀려 4위다. 중국전에서 3골차 이상으로 승리하고, 최종 5차전에서 홍콩까지 잡으면 마지막 날 중국과 일본의 경기 결과에 따라 3위에 오를 수 있다. 빙판 위의 기적은 꿈이 아니다.
박구인 기자 captain@kmib.co.kr
[기획] 무섭게 큰 한국 女아이스하키… 亞 ‘깜짝’
입력 2017-02-23 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