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인종차별은 법적 제제대상이다. 하지만 미국은 1960년대 중반까지 법률로 흑백 인종분리정책을 실시했다. 흑인과 백인은 모든 면에서 달랐다. 사는 곳도, 먹는 곳도, 학교도, 모임도, 다니는 교회도 달랐다. 대개의 경우 직장도 달랐다. 흑인 학생을 받기 싫어 학교를 폐쇄하는 백인학교가 속출했다.
흑인과 백인은 같은 버스를 이용할 수는 있었지만 좌석은 엄격하게 구분됐다. 흑인이 백인 좌석에 앉았다가 구속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흑인 중에서도 여성은 인종차별에다 성차별까지 이중차별을 받았다. 흑인들이 밟고 올라가는 아메리칸 드림의 사다리는 중간 중간 발판이 빠져 있고, 표면적으로 크게 성공한 흑인들도 언제 차별의 물결이 경제적 안정을 해칠지 몰라 불안해하던 암흑의 시절이었다. ‘히든 피겨스’의 시대적 배경이다.
‘히든 피겨스’는 이런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인류의 달 착륙에 기여한 흑인 여성 수학자의 실화를 그린 에세이다. 이 시절 대학을 졸업한 흑인들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은 교사나 우체국 직원이 전부였다. 그러나 전쟁은 여성, 흑인 여성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한 항공분야의 수학자 수요를 채우기 위해 수학을 전공한 흑인 여성들이 나사(NASA) 전신인 미국 항공자문위원회(NACA)에 고용되기 시작했다.
우주비행은 한 치의 실패도 용납하지 않는다. 0.999의 법칙이 적용되는 까닭이다. 1000번을 시도했을 때 실패할 확률이 한 번 미만이어야 할 정도로 우주계획은 치밀해야 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들이 수학자다. 캐서린 존슨을 비롯한 흑인 여성 수학자들의 기여가 없었다면 존 글렌의 우주비행(미국 최초의 우주비행)과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이 상당기간 지체됐을지 모른다.
비록 구소련에 인공위성과 유인우주선 발사의 선수를 뺏겼지만 결국 미국이 소련과의 우주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기저에는 편견과 차별을 딛고 묵묵히 자신들의 영역을 확대해나간 흑인 여성 수학자들이 있었다. 지지난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자유훈장을 받은 존슨처럼 유명인사도 있지만 드러나지 않은 영웅들이 훨씬 많다. 그래서 ‘히든 피겨스’(감춰진 인물)다.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무려 5년 동안이나 조사를 했다고 한다. 실화의 묵직함이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흑인들은 외친다. “세상은 흑인 아이들에게 백인 아이들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대가는 더 적게 주려 한다. 교육은 그런 세상에 대항하는 가장 확실한 방어수단이다.”
이 책은 이상만 품고 현실적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일깨운다. 한 가지 성취는 다음번 성취의 토대가 되고, 첫 걸음을 내디디면 어떤 일도 가능하다는 울림이다. 도전하고, 시작하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지난해 12월 백악관에서 특별시사회가 열렸을 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부인 미셸 여사는 이 영화를 보고 “백악관에서 히든 피겨스를 볼 수 있어 매우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 영화는 오는 26일(현지시간) 개최되는 8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작품상, 여우조연상, 각색상 3개 부문 후보에 지명됐다. 국내에는 3월 23일 개봉된다.
이흥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wlee@kmib.co.kr
[책과 길] 우주경쟁이 미 흑인여성들 ‘사다리’됐다
입력 2017-02-24 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