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흰색 등 단색 바탕 위에 선 긋거나 숫자 쓰는 행위 반복… 오세열 개인전 ‘암시적 기호학’

입력 2017-02-23 18:19
‘무제’ 2017년 작, 캔버스에 혼합매체, 181×227㎝. 학고재갤러리 제공
오세열 작가
수업이 끝난 후 교실에 남아 친구들과 칠판에 낙서하던 유년의 기억을 소환하는 작품들이다. 두텁게 칠한 검은 바탕을 긁어내 쓴 아라비아 숫자가 빼곡히 나열돼 있다. 오선지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친구야 놀자’ 글씨까지도. 화면 위에 붙어 있는 바람 터진 풍선, 분홍 하양 단추, 조가비, 넥타이, 빨간 고추 등 오브제에서는 장난기가 묻어난다. 따뜻하고 유쾌해지는 작품들이다.

오세열(72·목원대 명예교수)씨가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갤러리에서 개인전 ‘암시적 기호학’을 갖고 있다. 검은색 흰색 등 단색의 바탕, 선을 긋거나 숫자를 쓰며 나타나는 행위의 반복성 때문에 단색화가 연상된다. 지난 17일 만난 그는 “모노크롬은 맞지만 단색화는 전혀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자신의 작품이 ‘포스트 단색화’로 해석되는 것에 손사래를 치는 것이다. 단색화는 1970년대 박서보 하종현 등 일군의 작가들이 주도한 한국적 모노크롬 경향을 일컫는다. 박정희 정권에서 추진된 ‘한국성 찾기’의 영향이 크며 도공의 물레질을 연상시키는 동양적 무심의 행위로 해석된다.

오 작가는 “내게 캔버스는 동심의 도화지다. 현대 사회가 얼마나 메말랐는가. 그림은 즐거워야 한다. 보는 사람이 재미있다 즐겁다고 느끼면 족하다”고 말했다.

이는 반어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숫자 오브제 이미지 등은 그 자체가 하나의 기호다. 그의 회화는 후기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불안에 대한 치유와 위무의 메시지다. 넥타이는 현대인의 상징이지만 노란색으로 그려졌다. 유쾌함의 노랑인 것이다.

이런 ‘동심(童心) 모노크롬’이 시도된 것은 2000년대 이후다. 하지만 전시에는 이전 작품들이 대거 나와 작품세계의 변천사를 살펴볼 수 있다. 작가는 대학 졸업 이후인 1970년대 구상 계열 작품으로 출발했다가 진부함을 느끼고 80년대 형태를 해체하기 시작해 반추상의 길을 걷게 됐다. 마흔을 전후해 프랑스 파리, 미국 로스앤젤레스 등에서 열리는 아트페어에서 작품이 판매되는 등 인기를 누렸으나 목원대에서 30여년 교편을 잡으며 작업에서 멀어졌다. 2010년 정년퇴직 후 다시 맹렬히 작업하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3월 26일까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