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이 바둑 대결에서 알파고에 완패한 때문일까. 인공지능(AI)과 다시 맞서야 하는 인간의 얼굴에선 사뭇 긴장감이 묻어났다. 21일 AI와 번역 대결이 벌어진 서울 광진구 세종대 광개토관에서 번역가 4명은 각자 앞에 놓인 노트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번역해야 할 지문을 기다렸다.
오후 1시5분, 지문이 인쇄된 종이 4장이 담긴 봉투가 전달됐다. 번역가들은 한 장 한 장 꼼꼼히 문제를 확인했다. 5분쯤 지나자 ‘타닥타닥’ 타이핑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총 50분 동안 비공개된 공간에서 번역을 진행했다. 지문을 받는 초반 10분 정도만 언론에 공개됐다.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번역 특성 때문이다. 대결 도중 인터넷 검색도 허용됐다.
번역 대결은 인간의 압승으로 끝났다. 많은 전문가들이 예상한 대로였다. 승패를 가른 건 문학 지문이었다. 문학 지문에서 AI는 힘을 쓰지 못했다.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지문으로 출제된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의 ‘늦어서 고마워(Thank you for being late)’ 중 “There are vintage years in wine and vintage years in history, and 2007 was definitely one of the latter”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인간과 번역기는 크게 다른 모습을 보였다.
“포도주 생산에 특별히 포도 작황이 좋은 ‘빈티지’ 해가 있듯이 인류 역사에도 그와 같이 특별한 성취를 이룬 해가 있는데, 말하자면 2007년이 바로 그런 해였다”고 인간은 번역했다. 똑같은 ‘vintage years’라는 단어를 ‘포도주 작황이 좋은 해(vintage years in wine)’와 ‘특별한 성취를 이룬 해(vintage years in history)’로 구별해 전달력을 높인 것이다. 반면 AI 번역기들은 접속사 ‘and’를 어디서 끊어야 할지, 빈티지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번역기 3대 모두 어색한 번역을 내놨다. 오역도 있었다.
비문학 번역도 인간이 앞섰다. 다만 문학 지문에 비해서는 그나마 오류가 덜했다.
한 언론사의 칼럼에서 발췌한 “이웃에 사는 친구가 셀프 빨래방에 가자고 전화를 걸어왔다”는 문장을 영어로 번역했을 때 AI들은 인간처럼 “셀프 빨래방에 가자고” 하는 제의의 뉘앙스를 정확히 파악해 내지는 못했지만 아주 엉뚱한 답을 적지는 않았다. 번역가와 번역기 2대는 ‘셀프 빨래방’이라는 단어를 영미권 독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Laundromat’로 바꿨다.
번역 완성도는 정확성과 언어표현력, 논리 및 조직요소를 고려해 평가됐다. AI가 크게 앞선 속도 측면은 평가하지 않았다. 인간이 50분 동안 번역을 진행한 반면 번역기는 인간이 지문을 복사해 붙여 넣는 데 걸린 5∼10분이 전부였다.
현장에서는 대결 진행에 빈틈이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네이버 번역기의 경우 최신 기술인 N2MT(인공신경망) 번역이 가능한 글자 수가 한 번에 200자로 제한되기 때문에 예전 기술로 번역한 결과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임주언 기자 eon@kmib.co.kr
인공지능,영한 번역 문학지문서 맥 못췄다
입력 2017-02-21 17:47 수정 2017-02-22 0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