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 작은 문제가 하나 생겼다. 분양 당시부터 초등학교 신축 부지라고 홍보했던 땅에 광고와는 다르게 또 다른 아파트를 짓겠다고 건설사가 나선 것이었다. 교육청이 땅을 제때 구입하지 않았고, 법적으로도 아무 문제없다고, 건설사는 당당하게 나왔다. 그러자니 5년 전 입주할 때부터 이제나저제나 초등학교 개교만을 기다렸던 아파트 주민들 입장에선 황당하기 짝이 없을 뿐. 건설사가 초등학교 신축 부지에 새로 측량 깃발을 꽂고 건설 장비를 하나둘 들여놓기 시작하자, 입주민 대표자회의니 전체 입주민 회의니 하면서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처음부터 좀 비관적이었다.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면 결국엔 그렇게 되고 마는 법. 특히 돈과 관련된 일이라면 대한민국에선 예외나 사정, 인정을 바라선 안 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입주민들이 데모를 하자, 감사원이나 청와대에 민원을 넣자, 따로 변호사를 고용하자, 백가쟁명식으로 의견을 내놓을 때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 입주민들은 나와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었다. 입주민 전체회의에선 우선 급한 대로 땅파기 착공부터 저지하고 그 후에 하나씩 하나씩 일을 진행해나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당장 내일 새벽부터 공사 현장 출입구를 막고 데모를 합시다! 입주민들은 박수를 치면서 회의를 끝냈다. 나는 그런 입주민들의 열기가 조금 생급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다음날 새벽 다섯 시 무렵, 나는 밀린 원고를 쓰다 말고 단지 옆 초등학교 신축 부지 쪽으로 나가봤다. 데모에 참석하기 위해서라기보단 과연 몇 명의 입주민들이 나왔을까, 그것이 궁금해서 나가본 것이었다. 자정 무렵부터 눈이 내리고 기온도 영하 10도 아래까지 내려간 새벽이었다.
날씨 탓이었는지 새벽 시간 때문이었는지, 과연 공사 현장 앞에는 10여 명의 입주민들만이 옹기종기 모여 출입구를 막고 서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괜스레 나와 있는 사람들의 머릿수를 속으로 헤아리며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나와 있는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르신들뿐이었다. 두꺼운 점퍼와 마스크를 쓴 할아버지 할머니들. 그 어르신들 중 한 분이 힐끗 나를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아이고, 젊은 양반이 뭐한다고 이 새벽에 여길 나와? 그러자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내게로 향했다. 아이고, 저, 저, 추리닝만 입고 나오면 어떡하나. 어르신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를 보며 한마디씩 말을 보탰다. 한 어르신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이런 일은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해야지. 젊은 사람들은 출근해야지 않아? 거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서 출근 준비나 하소. 몇 명 나왔는데 우리가 다 돌려보냈어. 어르신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다른 어르신도 혼잣말처럼 한마디 보탰다. 우린 원체 새벽잠이 없어서. 내 바로 옆에 서 있던 할머니 한 분은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들기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여 들어가, 어여 들어가.
광장에서 젊은이들을 향해 증오와 혐오의 발언을 쏟아내는 어른들이 있다. 계엄령을 선포하라는 둥, 일부 정치인을 사형시키라는 둥, 헌법적 가치를 무시하는 주장을 토해내는 어른들이다. 기자를 폭행했다는 소식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다른 생각을 가진 어른들도 많이 존재한다.
어른이란 무엇일까? 다음 세대를 염려하는 사람들이 바로 어른 아닐까? 젊은 세대들이 그런 어른들의 존재를 잊을까, 걱정된다. 어여 들어가, 어여 들어가, 등을 토닥거려주는 어른들이 있는 삶.
이기호 (광주대 교수·소설가)
[청사초롱-이기호] 어른들이 있는 삶
입력 2017-02-21 17: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