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핀테크의 역설… 고객만 피곤한 ‘그림자 노동’

입력 2017-02-21 05:00

직장인 정모(29)씨는 최근 들어 재테크에 관심이 생겼다. 직장동료와 지인들에게 조언을 구한 끝에 펀드에 가입해야겠다고 생각한 정씨는 한 시중은행에서 내놓은 로보 어드바이저(Robo-Advisor) 애플리케이션을 내려받았다. 하지만 모르는 용어로 가득해 결국 포기하고 은행점포를 찾았다. 직원에게 자신의 투자 목표와 성향 등을 설명하고 몇 가지 상품을 추천받았지만 지인들은 “온라인으로 가입하는 게 수수료가 싸다”며 말렸고 정씨는 빈손으로 나왔다. 결국 정씨는 아무런 상품도 가입하지 못한 채 계속 발품만 팔고 있다.

금융권의 보이지 않는 노동이 늘고 있다. 기업에서 제공해야 할 서비스지만 고객에게 떠넘긴 업무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호갱’(호구와 고객을 합성한 은어)이 아니라 ‘현명한 소비자’가 되기 위해선 쉼 없이 발품을 팔아야 한다. 이러한 노동을 ‘그림자 노동’이라고 부른다.

그림자 노동이 확산되는 대표적 원인은 은행권의 핀테크(금융과 기술의 융복합 서비스) 강화다. 기존에 영업점포에서 하던 일의 상당수가 CD나 ATM 같은 자동화기기로 넘어갔는데 이제는 스마트폰을 통해 직접 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노동이 친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여러 시중은행들은 모바일 전용대출을 내놓으며 대면 서비스보다 저렴한 금리를 제공하고 있다. 결국 고객들은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서 앱을 깔고 회원가입을 해야 한다. 그래도 서류 제출이나 본인 확인 등을 위해 영업점을 방문해야 한다.

모바일 앱도 넘친다. 20일 구글앱스토어 기준 6개 시중은행이 운영 중인 앱을 다 합치면 100개가 넘는다. 계열 카드사까지 더하면 더 늘어난다. 인증·보안을 위해 추가로 앱을 내려받기도 한다. 비슷해 보이는 앱마다 기능이 달라 고객들은 혼란을 겪는다.

은행권의 뜨거운 감자인 창구거래 수수료도 마찬가지다. 고객이 창구를 방문해 입출금 등의 업무를 볼 때마다 수수료를 받는 것은 은행의 비이자 수익 확대 목적 때문이지만, 고객에게 비대면 거래를 강제한다는 측면이 있다. 모바일에 익숙하지 않은 고령층이나 모바일 소외계층에는 다른 노동이 생기는 것이다.

그림자 노동 확산의 이면에는 일자리 감소라는 문제도 있다. 노동을 고객에게 돌린 만큼 노동자가 필요 없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은행의 영업점포와 직원 수 줄이기엔 가속도가 붙고 있다. 금융감독원 금융통계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015년 9월 기준 5742개였던 6개 시중은행의 국내 영업점포는 지난해 9월 5558개로 줄었다. 올해에도 통폐합은 계속된다. KB국민은행은 이미 지난달 47개 지점을 통폐합했고 올해 100여곳을 축소할 예정이다. 다른 시중은행도 마찬가지다. 매년 구조조정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달 2800여명을 내보낸 KB국민은행을 포함해 각 은행에서 수백명이 명예퇴직이나 희망퇴직을 선택한다.

김은정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간사는 “금융의 대면과 비대면 서비스 수요와 공급이 다른데 일괄적으로 구조조정이 이뤄지는 건 우려스러운 면이 있다”며 “모바일 강화만 강조하다 보면 고령층이나 취약계층이 배제되는 문제도 있다”고 말했다.

■그림자 노동
보수나 대가를 받지 않고 당연히 하는 것으로 포장된 노동.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이반 일리치가 처음 제시한 개념으로 가사노동이 대표적인 그림자 노동이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크레이그 램버트는 저서 '그림자 노동의 역습'을 통해 오랜 시간이 걸리는 출퇴근 시간이나 셀프 서비스, 저렴한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발품을 파는 행위 등을 그림자 노동으로 정의했다. 종업원이 주문을 받는 대신 자동화기기를 이용해 고객이 직접 주문하는 것도 그림자 노동이다.











홍석호 기자 will@kmib.co.kr, 그래픽=전진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