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철 “김정남 안 죽였다”… 키맨 아닌 지원책?

입력 2017-02-20 18:37 수정 2017-02-20 21:14
말레이시아 경찰이 지난 17일 쿠알라룸푸르 인근에서 김정남 살해 용의자인 북한 국적자 이정철을 붙잡아 이송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북한에서 약학과 화학을 전공한 이정철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려놓은 화학약품 실험 모습. 현지 경찰은 이정철을 북한 정찰총국 소속 요원으로 보고 있다. 더스타·페이스북
신훈 특파원
김정남 암살 사건의 의혹을 풀 ‘키맨’으로 꼽혀온 이정철(47)이 “김정남을 죽이지 않았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말레이시아 경찰이 김정남을 살해한 혐의로 붙잡은 이정철 수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미 평양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알려진 나머지 북한 국적 용의자 4명은 신병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다. 이정철이 조력자에 불과하다는 보도도 나왔다. 현지 경찰은 이정철과 앞서 체포한 베트남인 도안 티 흐엉(29), 인도네시아인 시티 아이샤(25)의 진술에 의존해 수사를 이어나갈 것으로 보인다.

20일 현지 중문매체 중국보에 따르면 이정철은 경찰에서 “나는 암살에 관여하지 않았다. 김정남을 죽이지 않았다. 석방해 달라”며 결백을 주장했다. 이정철은 “사건 당일인 지난 13일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 가지 않았고, CCTV 화면에 잡힌 것도 아니지 않으냐”며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중국보는 덧붙였다. 또 두 여성 용의자를 전혀 알지 못한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정철이 김정남 암살 사건에서 주요 용의자를 돕는 후방지원 역할을 맡았다고 일본 교도통신이 보도했다. 도주한 북한 국적 용의자들이 범행에 이용한 차량의 소유자인 이정철이 운전기사로 이번 사건에 연루됐다고 교도통신은 덧붙였다. 실제로 현지 경찰은 사건 당일 용의자들이 공항에 도착했을 때 포착된 차량번호를 통해 이정철의 신원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쿠알라룸푸르 현지 사정에 밝은 이정철이 운전을 비롯해 거처 마련과 현장 안내 등 지원책을 담당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정철이 다른 용의자들과 달리 범행 이후 말레이시아를 떠나지 않고 자신의 아파트에 숨어 지낸 점도 미심쩍은 부분이다. 이를 두고 이정철이 북한에서 파견된 암살단을 단순히 지원하는 역할만 했을 것이라는 관측과 말레이시아에 거주하는 그가 사건을 뒷정리하는 역할을 맡았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정철이 독극물을 활용한 ‘완전범죄’를 노렸고, CCTV로 인해 범행이 드러나자 현지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설도 제기된다.

물론 이정철이 북한 정찰총국 소속 공작원일 가능성을 여전히 배제할 수 없다. 현지 언론은 약학과 화학을 전공하고 항암제를 제조하는 제약업체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이정철이 김정남 암살에 활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독극물 제조에 깊게 관여했을 것으로 강하게 의심하고 있다.

그를 고용한 말레이시아 현지 업체는 “이정철이 사무실에서 일하지 않는다”고 밝혔고, 실제로 이정철이 회사로부터 월급을 받은 사실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 ‘위장 취업’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경찰은 이정철의 역할, 그와 도주한 북한 국적 용의자 4명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또 이정철의 출입국, 통화 기록은 물론 가정과 직장 등 주변부까지 광범위하게 조사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이번 사건과 관련된 직접적 증거는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주한 북한 국적 용의자를 포함한 배후 세력과 이정철의 연결고리가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의 진술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것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수사 당국은 여성 용의자들이 암살에 활용한 스모킹건(결정적 증거)을 확보하는 한편 이지유(30) 등 이번 사건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북한 남성 3명의 행방을 쫓는 데 수사력을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쿠알라룸푸르=신훈 특파원 zorb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