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도주한 4인이 암살 주도… 北배후설 근거 확보”

입력 2017-02-19 18:28 수정 2017-02-19 23:32
노르 라싯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경찰청 부청장이 19일 쿠알라룸푸르 경찰청사에서 김정남 암살 사건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브라힘 부청장은 김정남 사건에서 신원이 확인된 남성 용의자 5명의 국적이 북한이라고 설명했다. AP뉴시스
강철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대사가 17일 쿠알라룸푸르 병원 영안실 앞에서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강 대사는 김정남 부검 결과를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AP뉴시스
김정남 암살 용의자로 지목된 북한 국적 남성들. 왼쪽부터 홍송학, 오종길, 이재남, 이지현.
김정남 암살 사건을 수사 중인 말레이시아 경찰이 이번 사건의 배후로 북한을 지목할 만한 강력한 근거를 이미 확보했으며, 이번 사건이 북한 소행이라고 잠정 결론을 이미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말레이시아 일간 뉴스트레이츠타임스는 19일 경찰 고위 소식통을 인용해 당국이 북한 국적자로 유일하게 검거한 용의자 이정철(47)이 북한 정찰총국 소속 비밀요원이며, 그와 이번 사건의 관련성을 입증할 만한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보도했다.

말레이시아 중국어 매체인 중국보도 이정철이 ‘매우 특수한’ 신분이라며 말레이시아 주재 모 대사관(북한대사관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과 접촉한 적이 있다고 보도해 북한 당국에 의한 김정남 암살 실행의 개연성을 높였다. 신문은 이정철이 중요 배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도주한 4명의 남성 용의자들을 주목했다.

그러나 싱가포르 매체인 채널 뉴스아시아는 말레이시아 경찰 고위 관계자를 인용해 이들 4명이 범행 당일인 13일 말레이시아를 떠나 17일 평양으로 돌아갔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쿠알라룸푸르에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해 북한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려고 일부러 3개국을 옮겨 다닌 것으로 보인다. 사건의 ‘몸통’은 북한으로 숨어버리고 ‘깃털’만 남은 셈이다.

말레이시아 중국어 매체 동방일보는 이정철이 암살 과정에서 중간 연락책이었으며 주범 4명을 위한 희생양일 것으로 추측했다.

암살 용의자들이 약 1년에 걸쳐 김정남의 뒤를 밟아온 정황도 드러났다. 뉴스트레이츠타임스는 2명의 여성에게 암살을 실행시킨 것으로 추정되는 남성들이 김정남의 이동 패턴을 파악하기 위해 그를 추적해 온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들의 정보 수집 내역엔 마카오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지를 오간 김정남의 항공편 일정이 포함돼 있으며 이를 통해 김정남이 최근 싱가포르에 머물렀던 정황도 알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남성 용의자 3명은 암살 당일 사건 현장 50m 거리인 공항 내 식당에 있었던 모습이 CCTV에 찍혔고, 또 다른 1명은 암살 순간까지 김정남을 따라붙었다.

한편 두 번째로 체포된 인도네시아 국적 여성 시티 아이샤(25)는 암살의 정황도 모른 채 김정남 살해범으로 이용당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아이샤의 가족을 인터뷰한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19일 아이샤가 사건 이후 가족들에게 “일본 TV 방송국에 고용돼 말레이시아에서 장난치는 몰래카메라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며 북한 암살 조직이 아이샤를 속여 암살에 동원했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아이샤의 올케 말라(25)는 아이샤가 지난달 하순 친정에 왔을 때 “1개월여 전부터 부업으로 장난 몰래카메라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프로그램이 방송되는 것은 일본 국내뿐이고, 연출자가 비디오도 주지 않아 출연한 영상을 본 적은 없다”고 언급한 내용을 마이니치신문에 전했다.

이런 보도 내용과 정황증거들을 종합해보면 김정남 암살이 적어도 1년 전부터 기획돼 ‘타깃’의 행방 추적이 시작됐고, 그 이후 ‘위장 청부살해’ 계획이 실행됐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구성찬 기자 ichthu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