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디트로이트 심포니 오케스트라(DSO)의 예술 감독 레너드 슬래트킨이 구설수에 올랐다. DSO단원들을 이끌고 모차르트 협주곡 전곡을 연주하던 그는 ‘4대의 목관을 위한 신포니아 콘체르탄테’를 프로그램에서 제외했다.
이 협주곡은 오리지널 악보가 유실되어 진짜 모차르트가 쓴 게 맞는지 오랜 논쟁 속에 있는 작품이다. 슬래트킨이 청중들에게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로 여러분에게 혼란을 주고 싶지 않다”고 말하자, 장내는 폭소와 박수로 가득 찼다.
‘대안적 사실’이란 표현은 트럼프 취임과 더불어 화제가 되었다. 트럼프 취임식 인파가 최악으로 적었다는 보도에 맞서 트럼프 대변인은 “역사상 최대 인파가 몰렸다”고 주장했다. 항공사진을 제시하며 이의를 제기하자 백악관 측은 “대안적 사실을 언급한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이 표현은 보는 각도와 데이터에 따라 다른 주장을 펼 수 있는 ‘경합하는 사실’을 일컫는 법률 용어다. 하지만 트럼프 측은 그들의 주장이 근거하는 물증을 제시하지 못하며 이 용어가 가진 중립적 가치를 망가뜨렸다.
‘대안적 사실’은 ‘단지 그들이 믿고 싶은 진실’을 꼬집는 냉소적 조크로 전락했다. 그 믿음은 아무런 객관적 실체도, 합리적인 이론도 기반으로 삼지 않는다. 특정 집단의 헤게모니에 격하게 동조하는 주관적 감정이 전부다.
하지만 그 힘은 파괴적이다. 그 주관적 감정이 ‘윤리’와 ‘도덕’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오랜 교육을 통해 주입되었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떳떳한 삶을 살았다는 개인의 자부심을 깨고 싶은 사람은 없다. 물증으로 명확해진 국정농단의 실체를 눈앞에 두고도 비공식적으로 떠도는 가짜 뉴스에 현혹되는 그들의 모습은 때문에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들이 믿고 싶은 진실’은 태극기 집회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윤리적이지 못하다는 믿음은 음악인들에게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대안적 사실’이다.
1986년 서울대 졸업식에서 어용교수 총장 발언에 반대한 학생들이 집단퇴장을 했다. 이때 유독 음·미대생들만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는데, 당시 성악가 출신의 국회의원 조상현은 이에 대해 예술가들은 정치보다 고귀한 삶의 아름다움을 염두에 두는 사람들이라 자리를 지켰다는 ‘신묘한’ 발언을 했다.
예술은 정말로 정치로부터 자유로운가? 사드 문제로 인해 조수미 백건우 등 한국 정상급 음악가들의 중국 진출이 가로막혔다. 트럼프의 이민 정책으로 요요마가 이끄는 실크로드 앙상블의 시리아 출신 주자는 해외 공연 뒤 그가 16년 넘게 살던 브루클린 집으로 한동안 돌아가지 못했다.
슬래트킨의 조크에 마음 상한 한 트럼프 지지자는 “당신의 조크에 웃을 수 없는 절반의 청중을 무시했다”며 그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다.
이에 지휘자는 이렇게 답했다. “내 평생을 정치와 결부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정부가 예술지원기금(NEA)을 폐지하며 예술계를 위협하는 지금, 내 목소리를 분명히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국 음악가들의 목소리를 듣게 될 순간은 언제일까.
노승림<음악 칼럼니스트>
[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대안적 사실과 믿고 싶은 진실
입력 2017-02-19 18:26 수정 2017-02-19 2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