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어린이병원이라는 게 있다. 맞벌이 부부 등을 위해 평일 야간이나 휴일에도 문을 여는 소아과를 말한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11월 달빛어린이병원 대상 지역을 서울에서 전국으로 확대키로 하고 공모를 진행했다. 아이가 밤중에 열이 나서 고생한 경험이 한 번이라도 있는 부모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사전 수요조사에서 최소 30∼40곳 소아과가 운영을 희망했지만 정작 최종적으로 신청한 소아과는 7곳뿐이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소청의사회)가 공모에 응하려는 병원을 협박하고 영업을 방해했다는 혐의에 대해 조사 중이다. 소청의사회는 달빛어린이병원이 소아 환자의 건강 증진에 도움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벼운 질환의 어린이를 밤에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보다 집에서 휴식과 안정을 취하다 다음 날 낮에 병원에 가는 것이 더 좋다는 논리다. 의학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보통 부모들에겐 궤변으로 들린다. 차라리 달빛어린이병원으로 환자가 쏠리게 될 현상이 우려된다는 주장을 폈다면 훨씬 솔직하게 들렸을 것이다.
의료는 서비스 영역이다. 서비스업은 고객 친화적이어야 한다. 달빛어린이병원에 대한 수요가 있으면 서비스 공급자가 이를 뒷받침해주는 게 순리다. 그런데 현실은 고객의 필요가 잘못됐으니 우리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다는 ‘갑(甲)’의 논리가 먹혀든다.
대한민국에서 의사는 0.1% 집단이다. 고등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상위 0.1%가 전국의 의대 정원을 다 채운 뒤에야 나머지 대학·학과들의 경쟁이 시작된다. 수입 면에서도 그렇다. 지난해 한국노동연구원 조사결과 소득 상위 0.1%에 해당하는 연소득 3억6000만원 이상인 사람 5명 중 1명(22.2%)은 의사였다. 미국은 이 비중이 5.9%에 불과했다.
그런데 의사들은 종종 스스로를 ‘의노’(醫奴·의사노예)라고 칭한다. 낮은 의료수가 때문에 수지를 맞추기 위해 하루에도 수백명의 환자를 보면서 노예처럼 일한다는 이유다. 하지만 나머지 99.9%의 국민들은 의노라는 말에 거부감을 일으킨다. 카데바(연구용 시신)를 앞에 두고 환하게 웃고 있는 의사들의 모습은 노예라기보다는 귀족에 가깝다.
통계청이 2년마다 조사하는 국민들의 의료서비스 만족도는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의료 서비스를 ‘서비스답게’ 만들 방법은 없을까. 의료보험수가 개선 등 여러 가지가 전제돼야 하겠지만 가장 손쉬운 방법은 수요와 공급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낮은 본인 의료비 부담 등으로 의료수요는 차고 넘친다. 반면 공급은 태부족이다. 인구 1000명당 의사 수(2014년 기준)가 OECD 회원국은 평균 3명인데 우리는 2명밖에 되지 않는다. 인구 10만명당 의대 졸업생 수는 2010년 8.22명에서 2014년 8.15명으로 뒷걸음질쳤다. 그런데 의대정원은 지난 10년간 3058명으로 요지부동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의사 공급 부족 현상이 지속되면서 2030년에는 적정 의사 수보다 9960명이 부족할 것으로 전망할 정도다.
전공의(레지던트)들의 과중한 업무를 분담하기 위해 입원환자전담전문의 제도가 시범 운영 중이다. 대형 병원들은 주40시간 근무에 연봉 1억5000만원의 조건을 내걸었지만 지원하는 의사가 없어 애를 먹고 있다고 한다. 고용대란 시대에 이런 의사들의 세태는 생경하다. 지금보다 의대 정원을 10%만 늘려도 자연스럽게 억대 연봉에 감격해하는 ‘진짜’ 의노가 생겨날 것이다. 서비스 질을 높이는 데는 경쟁만한 게 없다.
이성규 경제부 차장 zhibago@kmib.co.kr
[세상만사-이성규] 醫奴를 늘려라
입력 2017-02-16 17: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