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남, 망명 시도說이 죽음 불렀나

입력 2017-02-16 05:58
김정남이 김철(Kim Chol)이라는 가명으로 사용했던 페이스북 페이지. 외국 소재 학교 졸업 등 학력과 마카오 거주 중이라는 소개글도 보인다. 오른쪽 사진 2개는 김정남이 별도 설명 없이 올린 것이다. 2008년 1월 16일 마카오에서 찍은 것(위). 2010년 6월 15일 별도 설명 없이 업로드됐다(아래). 김정남 페이스북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맏아들 김정남이 피살된 것은 그가 해외 망명을 시도한 사실이 이복동생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을 자극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우리 정보 당국이 김정남의 망명 시도 여부를 공식 확인한 적은 없다. 그럼에도 김정은이 권력 승계의 큰 고비를 넘기는 시점에 김정남 망명설이 불거졌던 점을 돌이켜보면 이번 피살 사건과의 관련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김정남이 외부 세계에 처음 노출된 것은 2001년 5월이다. 김정남은 당시 도미니카 여권을 위조해 일본에 밀입국하려다 적발됐으며 세계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중국으로 추방됐다. 김정남은 1990년대 말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 등 중책을 맡았으나 일본 밀입국 사건으로 김정일 위원장의 눈 밖에 났고 결국 후계 구도에서 배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근 언론 보도를 보면 김정남은 이후로도 고모부 장성택을 배경으로 활동을 지속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유럽·코리아재단을 매개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었던 박근혜 대통령과 접촉했다는 얘기도 있다. 박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 북한도 비중 있게 대했다.

2007년 김정일의 건강이 악화되자 김정남은 아버지 치료에 정성을 들였다고 한다. 후계 구도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김정일은 건강을 회복한 후 2009년 1월 후계자로 김정남이 아닌 김정은을 지명했다. 후계자로 김정남을 밀었던 장성택은 이때부터 김정은의 후견인이 됐다.

김정남의 첫 망명설이 나온 것은 2010년 4월이다. 한 해 전인 2009년 4월 김정은은 국가안전보위부 요원을 동원해 평양에서 김정남 측근들의 파티장소인 ‘우암각’을 습격해 측근 조직을 체포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망명은 이뤄지지 않았고 이 시기부터 김정남은 ‘3대 세습 반대’ 등 해외 언론을 상대로 북한 체제 비난 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김정남은 이명박정부 말기인 2012년 12월에도 한국과 미국, 유럽에 망명 의사를 타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은 김정남이 정보 가치에 비해 지나치게 호화로운 생활을 요구하자 난색을 표했고, 마지막으로 한국행을 고려했지만 결국 단념했다.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처럼 피살될 가능성을 우려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국가정보원이 개입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대선 정국에서 보수 세력을 지원하고자 국정원이 김정남 망명을 기획했다는 것이다. 이명박정부는 김정남의 약점을 잡고자 그의 대남 소통 채널이었던 유럽·코리아재단의 모태 주한 유럽상공회의소를 사찰하고 해산시킨 것으로도 전해진다.

김정은 입장에서 남한에 약점이 잡혀 망명 논의가 오가는 이복형을 제거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집권 초기 김정은은 젊은 나이에 후계자에 올라 권력 기반이 튼튼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김정남이 망명에 성공한다면 자신의 정통성을 위협할 최대의 적수가 된다.

김정남은 결국 2012년 4월 한 차례 살해 위협을 넘긴 뒤 김정은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저와 제 가족을 살려 달라. 응징 명령을 취소해 달라. 갈 곳도 피할 곳도 없다. 도망갈 길은 자살뿐임을 잘 안다”고 하소연했다. 하지만 김정은의 살해 명령은 거둬지지 않았고 김정남은 계속 쫓기는 신세가 됐다. 특히 자신의 뒤를 봐주던 고모부 장성택마저 2013년 말 처형되고 고모 김경희도 유폐돼 정치적 생명이 사실상 끝나자 김정남은 더욱 고립됐던 것으로 보인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