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조선은 범과 표범의 나라였다

입력 2017-02-17 05:04 수정 2017-02-26 11:17
조선시대 한 포수가 자신이 잡은 호랑이 등에 올라 타 있는 모습. ‘산포수’로 불린 호랑이 사냥꾼들은 평시에는 호랑이를 잡았지만 유사시에는 나라의 부름을 받고 전쟁에 참여했다. 이돈수씨 제공
고려 말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는 조선의 복식문화에만 영향을 줬을까. 아니다. 생활·경제·국방·외교 등 다방면에서 변화를 초래했다. 여인네들은 다루기 편한 면포 덕분에 옷을 만드는 노동시간을 줄였다. 가볍고 질긴 면포로 지은 옷은 백성과 군사들의 생활을 한 단계 향상시켰다.

조선의 배는 고려 때보다 훨씬 커졌다. 면포를 이용해 더 넓고 더 큰 돛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선박은 더 많은 짐을 싣고도 더 빠르게 항해할 수 있었다. 여진과 왜구는 조선 면포를 구하는 데 사활을 걸었다. 면포는 조선에 부를 안겼고, 여진과 왜구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외교력의 원천이었다. 면포 수요의 증가는 목화 재배 면적의 확대로 이어졌다. 하삼도의 산림지대가 목화를 재배할 수 있는 밭으로 바뀌었고 화전도 늘어났다. 야생동물의 서식처는 급격히 줄었다.

인간 활동이 생태환경을 변화시켰고, 급변한 생태환경이 인간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저자는 인간의 삶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탐구하기 위해 생태환경사 연구방법을 선택했다. 15∼19세기 한반도를 주무대로 삼았다.

조선은 중농정책을 중시했다. 야생인 산림천택(山林川澤)을 인간이 이용하는 곳으로 바꾸기 위해 천방(川防·관개시설)과 화전을 사용했다. 산자락에서 시작한 화전이 산 정상까지 확장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정약용은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평지의 땅과 화전의 면적이 대등한 수준이었다”고 말한다. 그 정도로 화전이 많았다. 100∼200년 이상 키운 숲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화전은 17세기 조선이 당면한 국가적 재난이었다. 15세기쯤 대략 100만㏊였던 경작지는 19세기쯤 480만㏊로 늘어났다.

농경지 확대는 야생 생태계의 축소를 의미한다. 야생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인 범과 표범은 농경지를 확대하려는 인간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호환(虎患)은 경작지를 넓히려는 사람과 서식지를 지키려는 범과 표범이 충돌한 결과였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범과 표범을 잡는 포호정책을 실시했다. 범과 표범을 사냥하는 군사인 착호갑사가 성종 6년(1475년) 이후에는 1만4800명으로 급증했다.

범과 표범은 조선 건국부터 17세기 초까지 적어도 매년 1000마리 이상 포획할 정도로 개체수가 많았다. 여러 기록을 근거로 추론하면 한반도에 4000∼6000마리의 범과 표범이 살았다. ‘조선 사파리’였던 셈이다. 조선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1919∼23년 포획된 표범은 624마리, 범은 97마리였다. 하지만 포호정책과 생태계 파괴의 영향으로 급감하다가 20세기 후반 사실상 멸종했다.

소 사육은 중농정책의 핵심이었다. 세조 7년(1461년) 오키나와에서 암수 물소를 들여왔다. 경작 능력이 뛰어난 물소와 전통 한우를 교배해 육종한 것이 조선 한우다. 조선 초기 3만 마리로 추산되던 소는 18세기 후반 100만 마리 이상으로 늘었다. 1903년 대한제국을 방문한 러시아 학자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는 “한국소는 극동에서 제일로 치는 우량종”이라고 극찬했다.

무분별한 농경지 개간과 사육 소의 증가는 전염병을 몰고 왔다. 인분이 도랑을 통해 논으로 흘러들어 미생물을 번성시켰고 이중 시겔라균이 이질을 일으켰다. 소에서 유래한 홍역과 천연두가 조선시대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저자는 “과거 인간의 역사적 활동과 생태환경의 변화를 심층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대중의 질문에 역사학적으로 답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말했다. 최근 가축 질병이 창궐하고 있는데도 정부 대응은 미덥지 못하다. 생태환경은 인간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역습을 하기도 한다. 과거 교훈을 통해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염성덕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sdyu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