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몰래 먹는 피임약이 발견됐다. 결혼한 지 2년여 되도록 임신하지 못해 얼마나 속을 끓였던가. 게다가 출근한 뒤 집에선 또 밥을 짓는 연기가 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혹시 아내에게….
여기까지라면 자본주의 한국 사회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다. 아내의 불륜이야 지구촌 단골 소재가 아닌가. 그러나 북한 사회이기에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공장 노동자인 주인공 리일철은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 집안 출신이다. 아버지가 한국전쟁이 끝나고 소위 사회주의 협동경리가 갓 뿌리내리기 시작했을 때 북한에 도입된 랭상모(냉상모·냉상모판에서 기른 모)를 죽인 적이 있다. 실수인데 당국에 찍혔고 낙인이 됐다. 이후 그의 집안은 고향 원산에서 압록강 인근의 동네로 강제 이주 당했다. 어느날 리일철은 야간작업이 일찍 끝나 평소보다 빨리 귀가했다. 그런데 문짝 뒤에서 황급히 달아나는 검은 그림자…. 출신 성분 때문에 입당하지 못하는 남편을 애면글면 바라보는 아내에게 같은 아파트에 사는 부문장비서가 권력을 내세워 접근해 겁탈을 시도했던 것이다.
북한 작가 반디(필명)의 소설집 ‘고발’에는 장막에 가려 몰랐던 북한 사회의 실상이 고발하듯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도저히 뚫고 올라설 수 있는 출신 성분이라는 21세기 신카스트 제도에 절망해 국경을 넘는 리일철 일가를 다룬 ‘탈출기’가 대표적이다. 여행증 없이는 이동이 금지된 상황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노모의 임종을 지키려는 아들(‘지척만리’), 창밖으로 보이는 마르크스와 김일성 초상화에 경기를 일으키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유령의 도시’), 큰아버지로 모시는 이에 대한 믿음과 당에 대한 충성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재원(‘준마의 일생’) 등 평범한 가족들의 일상이 펼쳐진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통해 완전히 고립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는 북한 사회의 초상화다. 인간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유지할 수 있고, 생각의 자유를 요구하는 용기는 그걸 억누르는 힘보다 강하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반디는 북한의 솔제니친으로 불리는 반체제 작가다. 목숨을 걸고 반출한 그의 원고는 2014년 처음 국내에 선보였다. 당시에는 탈북 작가가 아닌 북한 거주 작가라는 점만 언급됐을 뿐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이 소설집의 문학성은 해외에서 먼저 알아봤다. 프랑스 3개국에서 번역돼 호평 받았다. 내달에는 영국 미국 캐나다 독일 스웨덴 등 17개국에서 출간된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번역해 맨부커상을 공동 수상한 데버러 스미스가 번역한 영국판은 지난해 말 영국 펜(PEN) 번역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출판사를 달리해 새 옷을 입고 나온 이번 소설집은 원문을 충실히 살리면서도 우리 표기법에 맞춰 가독성을 높였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책과 길] 해외에서 호평받은 北 반체제 작가의 소설집
입력 2017-02-17 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