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보영화 찍듯… 대담하게 김정남 독살한 뒤 2명 흩어져 도주

입력 2017-02-15 17:58 수정 2017-02-15 21:10
말레이시아 언론이 공개한 김정남의 인적사항. 출생지는 평양으로 돼 있고, 이름은 ‘김철(Kim Chol)’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뉴시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일어난 김정남 피살 사건은 첩보영화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한다. 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공항터미널에서 순식간에 범행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대담하면서도 잔인하다. 범인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장소가 오히려 상대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릴 수 있고, 도주에도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더 스타’ 등 말레이시아 현지 언론과 정보 당국의 설명을 종합하면 피살된 김정남이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제2청사에 모습을 나타낸 건 13일 오전이었다. 제2청사는 저비용항공사(LCC) 전용 터미널이다. 아시아 최대 LCC 에어아시아가 거점공항으로 이용해 늘 승객들로 붐빈다. 지난 6일 말레이시아에 입국한 김정남은 가족이 있는 마카오로 가기 위해 공항을 찾았다. 중국에서 보낸 경호원과 함께 다닌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이날은 혼자였다.

말레이시아 파드질 아흐마트 셀랑고르주 범죄조사국 부국장은 언론에 “김정남이 오전 10시(현지시간) 마카오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왔다가 9시쯤 사고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13일 비행 스케줄을 보면 이날 제2청사에서 마카오로 향하는 비행편은 오전 10시50분 출발하는 에어아시아 ‘AK 8320편’이 유일하다.

북한 정보원으로 추정되는 여성 2명은 오전 9시쯤 키오스크(무인단말기) 부근에서 셀프 체크인을 하려던 김정남에게 접근했다. 이 중 1명이 김정남을 직접 공격했다. 김정남이 저항할 수 없게 등 뒤로 몰래 접근한 후 얼굴에 독극물을 뿌린 것으로 추정된다. 김정남은 피습 직후 출국장 안내 직원에게 “누가 뒤에서 잡아챈 뒤 액체를 얼굴에 뿌렸다”고 말했다. 공격 수단이 스프레이인지 손수건 같은 천이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액체를 들이마신 김정남은 직원에게 “몸 상태가 좋지 않다. 도와 달라”고 말했다.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직원은 그를 바로 공항 내 치료센터로 데려갔다. 김정남은 이후에도 계속 두통을 호소했다. 발작 증세와 함께 의식을 잃기도 했다. 치료센터 직원들이 그를 20분 거리에 있는 푸트라자야 병원으로 이송하려 했으나 이송 도중 사망했다.

범인들은 범행 직후 인파에 묻혀 현장을 빠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현지 언론이 공개한 CCTV 영상에는 오전 9시26분쯤 흰 상의와 짧은 치마를 입고, 굽이 없는 신발을 신은 여성의 모습이 잡혔다. 해당 여성은 공항 건물을 빠져나와 택시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CCTV 화면에는 한 명만 포착됐지만 2명이 같은 택시를 타고 도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로선 범인이 북한 정찰총국 공작원일 수 있지만 제3국 출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정남은 당시 외교관 여권을 사용했다. 여권 기재 내용은 실제 김정남의 인적사항과 다르다. 여권에는 김철(Kim Chol)이라는 가명을 사용했고, 생년월일도 1970년 6월 10일생으로 기재돼 있다. 실제론 71년 5월생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남은 2001년 5월에도 가짜 여권으로 일본 입국을 시도하다 적발된 적이 있다.

현지 북한대사관은 김정남 사망 직후 병원을 찾아가 시신을 넘겨 달라고 수사 당국에 요구했다. 수사 당국은 부검이 필요하다며 거부했다. 김정남 시신은 부검을 위해 15일 오전 9시 쿠알라룸푸르 병원으로 옮겨졌다. 만일을 대비해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경찰과 3대의 순찰차가 따라붙었다. 북한대사관 직원은 부검을 참관하진 못했지만 하루 종일 병원에서 대기했다.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 그래픽=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