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노트] 라디오

입력 2017-02-10 17:43
영화 ‘라디오 스타’의 한 장면

라디오를 좋아한다. 음원으로 재생해서 듣는 것보다 노래에 디제이의 멘트가 덧붙여 나오면 귀가 행복해진다. 학창 시절, 라디오는 늦은 밤 찾아온 친구였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불 꺼진 방에 라디오를 틀어놓고 누워 있으면 “오늘도 수고했어”라고 나를 다독여줬다. 마흔을 훌쩍 넘겨버린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뭉클해진다.

며칠 전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이전에도 라디오 상담을 한 경험이 있는데, 늦은 밤 출연은 처음이라 설레었다. 모두 잠든 시간에 친구의 방을 몰래 찾아 들어간 느낌이랄까. 전파에 담겨오던 디제이의 포근한 목소리를 곁에서 들으니 지금이 겨울이란 걸 잊었다. 그동안 내가 아껴먹던 음악 하나를 세상과 나눌 수 있어서, 더 좋았고.

나는 왜 이렇게 라디오를 사랑할까, 하고 생각해 봤다. 어쩌면 라디오는 심리치료자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냥 놔두면 세상에 흩뿌려질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으고, 그렇게 모아진 이야기에 따뜻한 마음을 담아 다시 세상에 돌려준다. 그렇게 돌아온 삶의 이야기들은 나의 사연과 포개지고 이어지면서 고된 현실을 꿋꿋이 버텨낼 수 있게 해준다. 더 잘하라고 다그치지 않고, 네가 문제라고 비난하지 않으며, 어떤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네 편이 되어줄 거라고 말해준다.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용기를 내서 한 발 내딛어 봐’라고 응원한다. 좋은 글귀로 깨달음도 주고,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음악은 무뎌졌던 감정을 말랑말랑하게 풀어준다. 무엇보다 좋은 건, 라디오는 공짜다.

방송을 마치고 운전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라디오에 보내진 사연을 듣고 나니 ‘나만 힘들고 아픈 것은 아니구나’ 하고 안도감도 느껴졌고, ‘힘들다, 힘들다 해도 세상은 아직 살 만한 곳이구나’ 하는 위안도 얻었다. 그러고 보니, 라디오에서 상담을 해준 내가 오히려 사람들의 사연으로 치유 받았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다. 고마웠다. 한동안 나도 많이 지쳐 있었는데. 공중으로 쏘아진 전파가 세상 곳곳을 이어주듯, 멀리 떨어져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우리는 서로 서로 연결되어 살아갈 힘을 나눠주고 나눠받고 있었던 거였다.

김병수(서울아산병원 정신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