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파리에서 보낸 한 시간] 말하고 고발하라… 성폭력, 그후의 이야기

입력 2017-02-10 05:01

끔찍한 악몽이었다. 1990년 8월 1일 저녁 프랑스 파리의 한 아파트. 22살의 캐나다 여대생이 난생처음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떠나 마지막 여정으로 도착한 곳이었다. 옛 남자친구의 지인이 머무는 곳. 그곳을 숙소로 삼아 파리 여행에 나설 생각에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남자친구가 잠시 외출을 한 사이 그녀는 지인으로부터 두 차례 성폭행을 당한다. 식칼이 목을 짓누르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별다른 저항도 못한 채 고통의 순간만 이어졌다.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은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다.

그녀는 경찰 조사를 받고 다음날 급거 귀국했고, 범인은 한 달 뒤 검거돼 징역 8년에 처해진다. 정신적 트라우마는 곧바로 찾아왔다. 귀국 당일 공항에서 겪은 극단적 불안 증상인 공황발작이 대표적이다.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충격적인 기억의 파편은 호흡곤란 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평생 시달리게 했다. 그럼에도 수치심에 제대로 치료를 받지 않았다. 주변에는 사건을 감추었다. 극복 가능하다며 스스로를 거짓으로 위장했다.

대가는 혹독했다. 내면 상태가 형편없이 망가져갔다. 의지와 달리 몸은 지난 일을 기억했다. 한시도 자신이 안전하다고 여긴 적도 없었다. 만나는 상대방에 대한 불신은 여전했다. 비극적 사고방식에 심하게 내성적으로 변해갔다. 도움이 필요했다. 어쩔 수 없이 근 10년 만에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 심리 치료에 나선 이유다. 그로부터 기나긴 회복의 여정은 시작된다.

픽션이 아니다. 실화다. 주인공은 바로 저자인 캐나다 겔프대학교 철학 교수로 재직 중인 칼린 프리드먼(49)이다. 그가 ‘파리에서 보낸 한 시간’을 쓴 이유는 분명하다. 강간 사건은 개인적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치료와 회복에만 머물렀다면 이 책의 가치는 떨어진다. 책의 전반부가 사건의 기억, 파괴된 일상을 세밀하게 묘사한다면 후반부는 집단치료를 통해 발견한 연대와 극복 및 사회정의를 이야기한다. 후반부에 방점이 있는 것이다. 이를 호소하기 위해 강간범의 재판기록까지 찾아 기억을 복원해놓았다.

저자는 지적한다. 괴로운 내면 상태를 혼자 삭이려 들면 안 된다. 침묵은 결코 정답이 아니다. 근거 없는 통념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피해자들이 스스로를 탓해 여성 성폭력의 현실을 덮어선 안 된다. 여성 본인이 자신의 신체를 잘 간수할 수밖에 없다는 통념이 더욱 깊어져버리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가부장적 사회를 바탕으로 성폭력이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는데도 이를 사회구조와 관련 없는 별개의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가 2008년 중앙아프리카로 건너간 것도 여성에 대한 억압이 난무하는 중심지의 실상을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서다. 강간이 전쟁무기로 사용되거나 난민들을 다루기 위한 전략으로 활용되는 곳, 유아 및 영아 강간이 에이즈 치료수단으로 이용되는 곳. 이처럼 여성과 아이들이 폭력 앞에 점점 더 취약해지는 원인은 뿌리깊이 자리한 사회구조적 남녀불평등이라고 한다. 그 성적 테러의 현장을 파악하고자 아프리카 오지로 날아간다.

저자의 결론이다. “여성과 아동의 신체를 대상으로 남성들에 의해 널리 자행되는 조직적 만행은 폭력을 당한 희생자들의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점으로 간주돼야 할 것이다. 이는 가난이 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점으로 판단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성폭력은 분명 개인적인 차원에서 벌어진다. 하지만 성폭력을 근절시키고자 한다면 일단 케케묵은 가부장적 사회구조라는 틀을 조명함으로써 성폭력 문제에 접근해야 할 것이다.”

박정태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t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