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호 교수는 복토직파농사를 성공하기 위해 20여 차례의 방북 일정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했고, 북측에서는 정무원(총리실) 중점사업으로 지정했다. 나는 그해에만 23차례 방북했다. 그간의 방북금지를 보상이라도 하듯 하나님은 북한문을 활짝 열어주신 것이다. 나는 매번 박 교수와 농학자, 농민, 후원자로 구성된 방북단을 안내했다. 한번은 할렐루야교회 김상복 목사가 동행했는데 여행하는 내내 빨리 목사 안수 받을 것을 권면했다. 결국 1년 뒤 평양에서 받은 소명대로 안수를 받았다.
농사의 성패는 결국 하늘에 달려있었다. 복토직파농사는 좋은 결실이 예상됐지만, 추수를 앞두고 서리 때문에 비상이 걸렸다. 파종이 늦어져 조생종 볍씨를 심은 것이 문제였다. 평양은 ‘구구절 축제’로 들떠 있는데 홀로 평양에 남았다. 내 마음은 답답했다. ‘오늘 밤 서리가 내리면 어쩌지….’ 호텔방에서 밤새워 기도했다. 열왕기상 18장을 묵상하는데 엘리야의 마음이 다가왔다. ‘주여, 저들이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깨닫게 하소서.’ 북한을 지배하는 악한 영의 세력과 싸움을 한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날 밤 서리는 내리지 않았고 작황은 대풍년이었다. 북한 전역에 있는 협동농장을 대상으로 평가한 경진대회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우승기를 받고, 모든 농장원에게 상금이 주어졌다. 약전리협동농장에서의 일은 권혁만 PD의 현장취재를 통해서 KBS ‘추적 60분’에 방영되었다. 북한에서는 감사의 뜻으로 복토직파로 농사한 쌀 5t을 보내왔고, 이 쌀로 전북 지부는 북한 쌀과 남한 야채를 어우른 비빔밥을 만들어 잔치했다. 그뿐 아니라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2007년에는 고려항공을 이용한 두 번째 직항기 방북이 성사됐다. 새벽마다 ‘부흥’ 팀의 인도로 기도회를 열고, 낮에는 칠골교회에서 기념예배를 드렸다. 그때 고형원 선교사는 복음송 ‘동방의 예루살렘’을 작곡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다.
면류관에는 고난이 따라오는 게 성경의 이치이듯 혹독한 시련이 찾아왔다. 추적 60분의 게시판에는 나를 고발하는 댓글이 올라왔고, 인터넷에서는 정체를 모르는 단체로부터 고발이 이어지면서 검찰의 조사를 받게 됐다. 대선정국과 맞물려 1년 넘게 계속된 조사를 마치던 날 “돈 문제는 깨끗하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검사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나는 한민족복지재단을 퇴진하고 개척교회 목회자로서 삶을 시작했다. 험난한 길이었지만 한순간도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의 말씀을 내려놓은 적이 없었다.
7년이 지난 후 하나님은 20년 전처럼 이성희 목사와 함께 통일선교 사명을 감당하도록 나를 다시금 부르셨다. 통일 독일의 초대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는 “준비되지 않은 통일은 재앙이지만, 준비된 통일은 축복”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기에 한국통일선교연합이 나에게 부여하신 마지막 사명임을 인식하고 복음통일의 꿈을 이루는 그날까지 달려갈 것이다. 소중한 지면을 열어주신 국민일보와 독자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올려드린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역경의 열매] 김형석 <16·끝> 한민족복지재단 퇴진 후 개척교회로
입력 2017-02-08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