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형석 <15> ‘호텔 예배’ 뒤 3년 6개월 동안 北에 못 들어가

입력 2017-02-07 00:12
2005년 9월 한민족복지재단 몽골 지부장이던 최순기 선교사(왼쪽)가 울란바토르 새생명교회 설립 10주년 예배에 강사로 참석한 김형석 사무총장 부부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방북단이 평양을 떠나던 날 아리랑축전영접위원회는 평가회를 제의했다. 이 자리에서 김인철 상무위원이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앞으로 한민족복지재단 김형석 사무총장은 절대 공화국을 출입할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이후 나는 방북을 금지 당했고 그들은 나를 ‘공화국 창건 이후 최대의 반동’이라고 비난했다. 모든 선교지가 그렇지만 그중에도 북한은 특별한 위험지역이다. 라진·선봉에서 활동하던 이광덕 목사, 김재열 목사, 케네스 배(한국명 배준호) 선교사는 체포돼 심한 구타와 함께 옥고를 치르고 추방당했다.

방북 일정 도중에 사망한 경우도 있다. 1990년 9월에는 나성영락교회 김계용 목사가, 2006년 3월에는 몽골선교사 최순기 목사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지금도 북한에는 임현수 목사 외에 대한민국 국적의 김정욱 김국기 최춘길 목사가 억류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역자들은 계속해 북한을 드나든다. 왜 이렇게 위험한 곳인 줄 알면서도 찾아가는 것일까. 두말할 나위 없이 성령의 이끌림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고 유럽 선교를 시작한 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그런 점에서 이들의 행적이 바로 사도행전 29장인 ‘북한행전’이다.

2001년 7월 한민족복지재단과 북한어린이돕기 캠페인을 추진하던 국민일보에는 ‘남한 의사 북한서 첫 암수술’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사연은 이랬다. 국제로타리클럽 후원으로 평양의대병원에 임시 수술장을 차렸다. 그래서 3640지구 총재인 김진복 박사가 모니터링 하러 가는 기회에 수술을 집도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이후 평양의대병원에서는 6차례에 걸쳐 남북한 의료진의 합동수술이 진행됐다. 주로 심장병 수술이었는데 기독의사들은 수술 전에 기도로 시작했다.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은 도울 자를 보내셨다. 그중에서도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한인교회 북한선교위원장 조명호 집사는 내가 방북을 금지당한 것을 무척 안타까워했다. 한·미·일 3개국에서 첨단 정보통신(IT)기업을 운영하며 북한 고위층과 교제를 나누던 그는 암으로 투병하면서도 북한을 왕래하며 고려호텔 예배의 진상을 소명하기 위해 자원해 수고를 감당했다.

나는 2005년 12월 8일 민족화해추진협의회(민화협) 초청으로 개성을 방문했다. 3년 6개월만의 방북이기에 감회가 새로웠다. 한국농업대학 박광호 교수가 개발한 복토직파농법을 실험적으로 시행하기 위해서였다. 북측에서는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 김인철 참사가 대표로 나왔다. 아리랑축전영접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주일예배 불허를 통보하고 나를 방북금지 시킨 장본인이었다. 그가 멋쩍은 듯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복지재단 회장이 되셨더군요. 지난 일은 잊고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2006년 2월 11일 평양을 방문했다. 그 다음날 찾아간 곳은 평남 숙천군 약전리협동농장이다. 농업성 김명철 정책국장과 박명순 관리위원장을 비롯한 농장원들이 참석했다. 박광호 교수가 복토직파농사에 대해 설명하자, 박 위원장이 말했다. “농법은 좋은 것 같은데 그래도 농사는 일기가 좌우하지요.” 내가 웃으며 말했다. “일기는 내가 책임질 테니 농사만 잘 지으세요.”

나의 방북 재개를 위해 그토록 애썼던 조명호 집사는 이듬 해 하나님 곁으로 부름을 받았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