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 비디오아티스트 박현기 ‘회화’에 대한 갈증 풀어내다

입력 2017-02-05 18:50
‘무제’, 1993∼1994년작. 한지에 오일스틱, 157×104㎝.

차곡차곡 쌓아올린 동그라미와 네모. 각각에는 메모가 적혀 있어 설치 작품 ‘TV 돌탑’의 스케치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퍼뜩 든다. 실제 동그라미 옆에는 ‘돌’, 네모 옆에는 ‘텔레비전 모니터’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도 독자적인 회화 작품의 아우라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드로잉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 때문이다. 노랑 주황 연두 등 따뜻한 색들이 겹쳐져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기운이 느껴진다. 빨강 혹은 파랑의 원색 선만을 휘갈겨 기운을 표현한 듯한 작품도 있다.

비디오 설치 작품을 기대하고 간 전시장에서 뜻밖에 ‘회화’를 만났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박현기(1942∼2000) 개인전 ‘박현기-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다. 박현기는 ‘토종 비디오아티스트’로 불렸던 작가다. 일찌감치 1980년대부터 비디오 설치작품을 선보였다. 모니터를 돌 나무 대리석 등 자연적인 재료와 결합시킴으로써 동양적 명상성이 느껴지는 설치 작품을 만들어냈다.

고향 대구에서 지역 미술가들과 ‘대구현대미술제’를 이끌며 전위적 미술 운동을 했던 그였다. 2년 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도 대규모 회고전을 하며 설치작품 위주로 비디오아티스트로서의 그의 정체성을 조명한 바 있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는 포커스를 회화에 뒀다. 그는 1993∼94년 집중적으로 크레용 같은 오일 스틱을 사용해 회화 작품을 했다. 미술평론가 강태희씨는 작가가 이런 대형 드로잉 작업을 한 것에 대해 회화 작업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평생 설치와 영상작업을 했지만 “왜 내 작업은 페인팅(회화)으로 풀어낼 수 없을까”하는 궁금증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수채화나 유화가 아니라 오일스틱 그림이라는 것도 특징이다. 아이들도 쉽게 쓰는 크레용 같은 오일스틱을 사용함으로써 낙서 같은 효과를 낸다. ‘물=심’ ‘영혼(spirit)’ ‘물질(matter)’ ‘유토피아(utopia)’ 같은 심오한 뜻을 담고 있는 단어들이 있는 작품도 있지만, 글자든 이미지든, 선을 긋는 행위든, 모든 것은 중첩이 돼 어떤 명랑한 기운을 발산한다.

박현기의 작품세계에서 간과되어 왔던 ‘회화’를 조명하는 이번 전시는 설치 작품조차도 회화가 갖는 평면성을 부각시키는 디스플레이를 택해 눈길을 끈다. 예컨대 낡은 침목을 켜켜이 이어 붙여 커다란 사각형으로 만든 작품은 단색화 캔버스의 효과를 낸다. 1층과 지하 1층에 각각 전시한 ‘만다라 시리즈’, ‘물 이미지 모니터 시리즈’는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서 나온 것인데도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만다라 시리즈는 영상 작품으로 장면들이 모자이크처럼 조각조각 움직이고 화면 전체에는 특정 이미지가 쉼 없이 중첩된다. 바닥과 3개의 벽에 하나씩 설치해 마치 움직이는 이미지의 캔버스를 보는 듯하다. 디스플레이의 힘을 보여주는 전시다. 오는 3월 12일까지(02-2287-3500).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