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오케스트라와 민주주의… 그리고 정치인

입력 2017-02-06 05:23
20일 내한하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LSO)는 영국 클래식계를 대표하는 명문 악단이다. LSO가 지금의 위상에 오르기까지 LSO 사장을 맡았던 에드워드 히스 전 영국 총리의 역할이 컸다. Ranald Mackechnie 제공
‘오케스트라’라는 조직은 민주주의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음악가들이 고용주였던 왕과 귀족의 그늘에서 벗어나 예술·정치·경제적으로 그들만의 독립적인 단체를 일군 것이 근대 오케스트라의 태동이다. 오는 20일 내한하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LSO)도 그 중 하나로, 1904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유한책임회사’라는 이름으로 창단됐다.

오늘날의 명성을 누리기까지 이 악단은 부침을 거듭했다. 자본주의 현실은 순진한 예술가들의 이상을 실현하기에 거칠기 그지없었다. ‘세계의 오케스트라’ 저자 헤르베르트 하프너는 LSO가 지금까지 적어도 다섯 번의 몰락의 위기를 극복했다고 전한다. 전쟁, 정치적 갈등, 경제적 불황 등 주로 음악 외적인 이유였다. 그때마다 악단은 다양한 시도로 탈출구를 모색했다. 그중에는 신탁회사 설립도 포함되어 있었다. 악단 재정을 담당하는 전문 경영인이 영입되었고,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직접 돈을 벌 궁리를 하지 않고 온전히 음악에 몰입할 수 있게 되었다.

LSO 사장 자리를 거친 인물들 중에는 저명한 정치 경제계 인사들이 많았다. 그중 한 명인 에드워드 히스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자수성가하여 유럽경제공동체 영국 수석대표와 영국 보수당 대표를 거쳐 총리직(1970∼74)을 역임한 인물이다.

클래식 애호가였던 그는 LSO의 오랜 단골 청중이자 후원자였으며 LSO 사장을 맡은 뒤에는 정치적 경제적 역량을 총동원하여 악단의 재정 기반을 탄탄하게 다져주었다. 그는 뛰어난 경영 성과 뿐 아니라 세련된 음악 지식과 음악가에 대한 배려로 단원과 청중을 사로잡았다. 1974년 히스는 이 악단을 직접 지휘하며 지휘자로 데뷔하기도 했다.

포디엄까지 올라가지 않더라도 세계 유수의 공연장 객석에서는 히스와 같은 정재계 인사들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LSO 플루티스트 가레스 데이비스는 자신의 에세이집에서 LSO 뉴욕 공연에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찾아왔던 기억을 적고 있다.

메르켈 독일 총리는 여름이면 부부동반으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찾아가 4시간이 넘는 바그너 공연을 관람한다. 열혈 바그너 애호가로 알려진 고이즈미 전 일본 총리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찾아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고위직이 아닌 일반 정치인이나 정책 실무가들은 더욱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조용히 청중의 일원으로 찾아와 공연을 관람하고, 옆자리 객석의 반응을 지켜보고 대중들의 정서를 살핀다. 때로는 그곳에서 영감을 얻어 암묵적 외교를 성사시키거나 정책을 구상하기도 한다. 다양한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공연장이 민심을 읽기에 최고의 장소임을 그들은 안다.

유독 그런 정치가들을 공연장에서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정치인은 고사하고 정책에 직접 관여하는 정부의 사무관들조차 세종시로 내려간 뒤에는 객석에서 종적을 감췄다. 현장에 없는 이들의 머리에서 나온 정책이 피상적이거나 비합리적인 건 당연한 결과다.

한국 정치가가 올 때도 있긴 하다. 하지만 떠들썩한 의전으로 공연 진행을 방해하는 촌스러운 행태로 관객의 빈축을 사는 경우가 많다. 조기 대선이 성사된다면 곧 선거운동을 벌이는 정치가들의 모습이 사회 곳곳에서 보일 것이다. 잠시 그들로부터 벗어나 머리를 식히고 싶다면 공연장을 찾아오시라. 그곳에서는 절대로 정치인들을 만나지 않을 거라 감히 보장한다.

노승림(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