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장지영] ‘악의 평범성’ 너머

입력 2017-02-02 17:41

요즘 이곳저곳에서 ‘악의 평범성’이란 문구가 자주 들린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작성과 실행에 부역한 공무원들을 설명할 때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듯하다. 악의 평범성은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아렌트는 1960년 나치 시절 유대인 수백만 명을 강제수용소로 보낸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에 잡지 뉴요커의 특파원 자격으로 참관했다.

2차대전 직후부터 도피했던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정보기관에 체포돼 공개재판에 회부된 것은 세계의 주목을 모았다. 그는 나치 협조와 유대인 학살 등 15가지 죄목으로 기소됐다. 그런데 재판정에 등장한 그의 모습은 끔찍한 전범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50대 아저씨였다. 아렌트가 보기에 그는 신념에 찬 나치가 아니라 성실한 공무원이었다.

그 역시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했다. 자신이 유대인을 박해한 것은 상부의 지시를 따른 것일 뿐이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의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2년 후 사형을 당했다. 아렌트는 재판 이후 아이히만의 잘못은 전체주의적 권위 아래 마비된 판단력이라고 주장했다. 즉 국가에 순응하는 보통 사람들이 악을 저지르는 ‘악의 평범성’ 논리다.

아이히만이 그저 상부 명령에 복종하는 성실한 공무원이었을까. 아렌트 이후 연구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에 적극적인 의지를 가졌던 나치 숭배자였다. 예루살렘 법정에서 아이히만은 자신의 신념을 숨기고 선량한 공무원인 척 연기한 것이다.

실제로 억압적인 지배구조에 동참하는 행위자들은 맨 처음엔 그런 의지가 없었을지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내면화 과정을 겪는다고 한다. 즉 공무원이 관료 시스템 안에서 단순히 명령을 실행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점차 자신의 일을 정확히 인지하고 의미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출세와 경제적 이익, 조직 보호 등 여러 이유로 명령을 뛰어넘는 악행까지 벌인다.

최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문체부가 박근혜정권의 단순한 하수인이었다는 동정적 의견도 나온다.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처음 폭로했던 유진룡 전 장관이 특히 이런 논리를 펼치고 있다. 문체부 출신인 그는 블랙리스트를 둘러싼 잘못이 박 대통령, 김기춘 전 비서실장, 조윤선 전 장관 등에게 있지 공무원들은 실질적으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유 전 장관의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최근 문체부 김모 국장이 2014년 블랙리스트에 항의해 좌천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유 전 장관은 김 국장이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계속 문제를 삼다가 김종덕 전 장관에게 찍혔다고 주장했다. 김 국장은 인터넷에서 단번에 ‘블랙리스트 투사’가 됐고, 문체부는 그를 최근 인사에서 본부로 복귀시켰다.

그런데 그는 2013년 예술인복지재단 심재찬 이사장과 직원들에게 대외비인 예술인 지원 심사위원 및 지원자 명단을 내놓지 않았다는 이유로 “찍어 자르겠다”고 협박한 당사자다. 당시 그의 발언은 모 인터넷 매체가 녹취 파일을 입수해 보도하면서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이외에도 문체부 공무원이 문화예술계에서 블랙리스트 못지않은 갑질을 한 사례는 적지 않다. 그래서 최근 문체부 실·국장의 대국민 사과에 대해 ‘피해자 코스프레’라는 말이 나온다.

앞으로 블랙리스트에 부역한 문체부 공무원의 범위를 놓고 뜨거운 논쟁이 일 것 같다. 해체설까지 돌고 있는 문체부가 사는 길은 지금 같은 조직 감싸기가 아니라 스스로 처절한 단죄에 나서는 것이다.

장지영 문화부 차장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