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에서 공을 받느라 쓰러지고 또 쓰러진다. 경기가 끝나면 팔과 다리에 훈장 같은 멍이 새겨진다. 프로배구 수비 전문 선수 ‘리베로’의 운명이다. 베테랑 리베로 김해란(33·KGC인삼공사)과 여오현(39·현대캐피탈)은 이 궂은 일이 천직이라고 말한다. 둘은 공격수였지만 리베로로 전향해 V-리그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있다.
김해란은 지난달 31일 대전충무체육관에서 열린 현대건설과의 2016-2017 NH농협 V-리그 여자부 경기에서 7500 디그(상대방 공격을 받아내는 리시브) 고지에 오르며 팀의 3대 0 완승을 이끌었다.
2005년 V-리그 원년부터 뛰었던 김해란은 333경기에서 무려 7509개의 디그를 성공시켜 선두를 달리고 있다. 2위인 남지연(6329개·IBK기업은행)과의 격차는 1000개가 넘는다.
김해란은 지난 시즌 V-리그 남녀부 최초로 1만 수비(서브 리시브+디그)를 달성했다. 현재 기록은 1만1236개. KGC인삼공사는 김해란의 활약에 힘입어 3위를 달리고 있다.
김해란은 뛰어난 공격수로 활약하며 주목을 받던 마산제일여고 3학년 시절 발목이 골절되는 큰 부상을 당했다. 프로 팀들은 김해란을 외면했다. 김명수 전 도로공사 감독만 김해란을 품었다. 그는 김해란에게 “너는 리베로를 하지 않으면 국가대표가 될 수 없다”며 포지션 변경을 권유했다. 김해란은 리베로로 변신했고, 주전 자리를 꿰찼다. 김해란은 과거 혼자 벽 앞에서 하루에 1000개씩 수비 운동을 했다고 한다. 가장 큰 장점은 타고난 순발력이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순발력이 떨어지는데 김해란은 여전히 동물적인 감각으로 스파이크를 척척 받아낸다.
KGC인삼공사 관계자는 “이해란은 주장으로서 코칭스태프와 선수들 간의 가교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며 “후배들을 다그치기는 것이 아니라 솔선수범하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김해란은 ‘미친 디그’, 발발이’ 등 많은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여자 여오현’이라는 별명을 가장 좋아한다. 한국 무대에서 여오현이 최고의 리베로로 꼽히기 때문이다.
플레잉코치인 여오현은 ‘월드 리베로’로 통한다. 여오현은 키가 175㎝로 배구선수로는 작은 편이다. 이 때문에 홍익대 2학년 때까지 레프트로 뛰었던 여오현은 배구를 그만두려고 했다. 그런데 1997년 프로배구에 리베로 제도가 도입되면서 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2000년 삼성화재에 입단한 여오현은 2002년부터 2011년까지 10년간 국가대표 주전 리베로로 활약했다. 2002 부산아시안게임, 2006 도하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이 연속 금메달을 따는데 숨은 주역이었다. V-리그에서는 올해의 선수상, 수비상, 리베로 상 등을 휩쓸었다.
역대 디그, 리시브, 수비 부문에서 모두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여오현은 45세까지 현역으로 뛰겠다는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여오현은 2일 천안유관순체육관에서 열린 우리카드와의 홈경기에서 디그를 5개 잡아내며 현대캐피탈의 3대 2(19-25 18-25 25-22 25-20 15-13) 역전승에 힘을 보탰다. 현대캐피탈은 이날 승리로 17승10패(승점 49)를 기록, 2위를 유지했다.
공격수들의 화려한 스파이크뿐만 아니라 노장 리베로인 김해란과 여오현의 끈끈한 수비도 V-리그의 볼거리를 풍성하게 하고 있다.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
“받아야 산다”… 리베로는 나의 운명!
입력 2017-02-02 18:23 수정 2017-02-03 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