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아직도 진영논리에 매몰된 한국정치

입력 2017-02-02 17:24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20일 만에 대선 경쟁을 포기한 가장 큰 요인은 본인에게 있다. 준비가 부족했던 듯하다. 국민에게 이렇다 할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했다. ‘정치교체’와 ‘대통합’을 얘기했지만 그건 대선 주자들이 다 하는 말이다. 정치를 ‘어떻게’ 바꾸겠다는 건지, 통합을 ‘어떻게’ 이루겠다는 건지 자신만의 구체적인 비전과 구상을 먼저 꺼냈어야 했다. 그것이 없다면 애초에 뛰어들지 말았어야 하고, 있는데 지난 20일을 그렇게 보낸 거라면 유권자가 뭘 원하는지 몰랐다는 말이 된다. 아무튼 반기문 카드는 소멸됐다. 이제 대선판에서 거론할 일이 별로 없어졌지만, 그에게 반응했던 정치권의 모습은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한다. 반 전 총장이 귀국한 뒤 그가 어떤 리더십을 갖고 있는지, 어떤 정책을 펴려 하는지, 여러 현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한 정치인이 과연 있었는지 의문이다. 정치권이 20일 동안 그에게 물은 것은 딱 하나였다. “당신은 보수냐 아니면 진보냐?”

새누리당 인명진 비상대책위원장이 반 전 총장을 처음 만나 했다는 질문은 우리 정치권의 수준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1일 반 전 총장과 마주앉자마자 “보수에 속합니까, 진보에 속합니까”라고 물었다. 반 전 총장이 “사람들을 양쪽으로 놓고 보수냐 진보냐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국제사회도 진영논리보다 사안별로 문제를 어떻게 푸느냐가 중요하다”고 답하자, 인 위원장은 “낙상주의”란 말을 꺼냈다. “겨울에는 여기저기 다니면 낙상하기 쉬워서 집에 가만히 있는 게 좋다”며 보수 진영에 오지 않으면 다칠 수 있다는 식의 농담 아닌 농담을 했다. 반 전 총장은 귀국길에 자신을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표현했다. 나는 진보도 아니고 그렇다고 보수에 설 생각도 없으니 다른 기준에서 봐 달라는 뜻일 텐데, 정치권의 양 진영에선 이구동성으로 “정체를 밝히라”고 압박했다. 영호남을 번갈아 오가면서 진보와 보수를 아울러 보겠다는 반 전 총장 생각은 순진했고, 그에게 한 편을 택하라고 강요한 정치권의 진영논리는 집요했다. 그의 실패는 편 가르기로 쌓아올린 한국정치의 진입장벽이 얼마나 견고한지 말해준다.

진영은 지도자의 생각과 판단을 극히 제한하는 일종의 올가미와 같다. 진보 진영의 후보, 보수 진영의 주자를 자임하고 당선될 경우 그 진영의 논리에서 벗어나는 의사결정은 설령 국민을 위한 것이라 해도 선뜻 내리기 어려워진다. 진영에 기대면 표를 얻기는 한층 수월해도 성공한 대통령이 되는 길은 그만큼 멀어진다는 걸 정치권과 대선 주자들이 어서 깨달아야 할 것이다. 박근혜정권은 장황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가며 철저한 진영논리로 정부를 운영했다. 그래서 이 모양이 된 나라를 다시 세우자고 선거를 하는데 또 진영에 의지해 편을 가른다는 건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