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송병구] 개혁 500년, 교회가 선 자리

입력 2017-02-02 17:27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500주년을 맞은 올해는 한국교회가 자신을 돌아볼 최적의 해이다. 국민적 과제로 적폐청산을 모색하는 이때에 ‘흔들리는 한국교회’가 다시 공의의 방향타를 잡고, 개혁의 고동을 울릴 기회라는 말이다. 시민사회가 손꼽는 개혁과제 가운데 첫손을 꼽는 대상이 검찰과 언론 등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면, 그 다음 순위에서 교회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새 시대는 낡은 파도를 넘어서는 새 방주를 요구하게 마련이다.

루터의 개혁유산 상속자라 할 수 있는 독일개신교회(EKD)는 500년 대희년을 앞두고 10년 전부터 ‘루터 10년’ 프로젝트를 실시하였다. 개혁의 우산 아래 있던 정치, 사회, 교육, 예술, 종교영역 등 10가지를 10년 동안 심층적으로 성찰하는 프로그램을 전개해 온 것이다. 역사적 의미를 규명하고, 미래의 전망을 세우려는 뜻이었다. 2015년의 주제는 ‘종교개혁, 그림과 성서’였는데, 비텐베르크 궁정화가 루카스 크라나흐와 이름이 같은 아들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1515∼1586)가 그해에 출생 500년을 맞았기 때문이다.

그는 종교개혁의 주제의식과 관련한 ‘주님의 포도원’(1569년)을 그린 당사자다. 주님의 동산 위에 서로 마주한 두 개의 포도밭이 있다. 하나는 교황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루터의 것으로 담장 사이로 경쟁심리가 가득해 보인다. 교황의 포도밭은 한눈에 봐도 나무가 비틀어졌고, 열매도 보잘것없다. 게다가 우물은 샘이 말라 돌무더기가 쌓였다. 더 이상 소망이 없는 황폐한 땅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정반대로 루터와 개혁자들의 포도밭은 넉넉한 수확 때문에 기쁨으로 가득하다.

젊은 크라나흐는 묻는다. 교황과 루터, 과연 누가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인가? 그는 성경의 비유를 빗대어 교황과 루터 사이를 심판한다. 성경에서 포도주의 맛과 양은 종종 역사의 진실을 분별하는 시금석이었고, 사회정의와 경제윤리를 일깨웠다. 농부이신 하나님은 기대했던 최상급 포도밭에서 들포도가 맺은 것을 보고 탄식하신다. 예언자들은 정의를 잃은 결과 내 손으로 가꾼 포도밭에서 포도주를 못 마신다거나, 어리석고 부패한 임금 탓에 망할 포도밭의 수확이 불 보듯 뻔하다고 고발하였다.

루터보다 100년 앞선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의 상징은 성찬용 포도주 잔을 뜻하는 ‘성배(聖杯)’였다. 후스의 성배는 성찬주를 독점해 온 사제의 특권을 거부하고, 주님의 식탁에서 골고루 포도주를 나누려는 당시에는 신앙평등주의 심벌로, 근래에는 체코 민주화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후스든, 루터든 종교개혁이란 거대담론은 상식에 반하는 신앙에 대해 의문을 품는 일에서 출발하였다.

거대한 권위에 도전한 결과 후스는 1415년 콘스탄츠공의회에서 화형을 당했는데, 그는 죽어가면서 “지금 거위 한 마리를 불태우지만 한 세기가 지나면 태우지도 끓이지도 못할 백조를 만나게 될 것”이란 예언을 한다. 후스는 체코어로 거위란 뜻이다. 정확하게 100년이 지난 후 루터가 불을 지핀 개혁운동은 마침내 가톨릭교회를 균열시키고, 유럽세계에 정치적으로 큰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피값’으로 산 위대한 열매였다.

그러나 상황은 역전되어, 개혁의 자녀로 태어난 개신교회는 상속자라는 자부심보다 점점 더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주님의 식탁에서 포도주는 맛을 잃고 변질되었다. 오히려 특권은 남용되고, 거룩한 질서는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네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사 1:22)라는 예언자의 비판의식마저 희석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우리는 오늘의 포도밭의 건강도를 재삼 물어야 한다. 주님의 포도주는 여전히 붉고, 공동체의 식탁은 공평한가?

송병구 색동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