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상상도 못하는 직항기 방북을 나는 두 번씩이나 경험했다. 나는 왜 북한을 다녔는가. 북한에서 무슨 일을 했는가. 이제부터 그 물음에 답하려고 한다. 2002년 6월 14일 남북연합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방북단 297명이 인천공항에 집결했다. 대한항공 전세기가 이륙한 지 10분도 안 됐다. “우리 비행기는 백령도 해상을 통과해 북한 영공으로 접어들었습니다.” 기내 방송에 일행은 일제히 환호와 박수로 화답했는데 금방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서해직항로 531㎞를 정확히 65분 만에 비행했다. 순수 민간차원에서 직항기를 이용한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방북이었다. 나의 33번째 방북은 이렇게 시작됐다. 방북단은 버스 10대에 탑승하여 고려호텔로 직행했다. 순조롭게 풀려가는 상황을 보며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불과 보름 전인 5월 30일 베이징에서 범태평양조선민족경제개발촉진협회(범태) 이도경 회장을 만나 “북한선교단을 조직해 직항기로 평양을 방문해주세요”라는 제안을 받고 남북연합예배를 준비한 지 1주일 만에 합의서와 비행허가서, 신변보장 각서 등 방북신청 서류를 전달받아 통일부에 제출했다. 그리고 다시 1주일 만에 300명의 방북단을 모집하고 전세기를 계약하고 방북 승인을 받았다. 이런 일들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지금 와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게다가 5박 6일 일정에 전세기를 이용해 평양에서 연합예배를 드린 후 백두산을 다녀오는데 회비가 150만원이었다. 긴박하게 진행된 15일 동안의 일정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다. 매순간마다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고려호텔에 도착하자 아리랑축전영접위원회 관계자 4명이 찾아와 아리랑 공연부터 보러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합의서 대로 진행할 것을 요구했다. 범태와 체결한 합의서에는 “아리랑공연은 남북연합예배를 드린 후 희망자에 한해 관람한다”고 돼 있었다. 통일부의 방북허가서에도 “아리랑공연을 관람하지 말 것. 부득이 한 경우 방북 목적을 달성한 후에 일부 인원만 관람할 것”을 허가조건으로 제시했고, 나는 통일부 방침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아리랑 공연 관람을 놓고 북한의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위)와 범태, 방북단 사이에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이 일로 방북단은 호텔 출입이 통제된 채 감금상태에 놓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대남사업 주도권을 두고 공조직인 ‘아태위’와 김정남이 관련된 비선라인 ‘범태’가 극도로 대립하며 갈등을 빚던 때였다.
당초 남북연합예배가 예정된 16일 밤 12시43분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아리랑축전영접위원회 상무위원 김인철 참사였다. 그는 대뜸 “오늘 연합예배는 없습니다. 묘향산에 관광 가십시오.” 거세게 항의해도 소용이 없었다. 착잡하기가 그지없었다. 53명의 목사를 포함한 297명의 방북단이 주일예배 대신 묘향산관광을 가야한다니 기가 막혔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 마음은 어떤 박해를 당해도 반드시 주일성수를 해야 한다는 쪽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죽으면 죽으리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새벽녘에 최홍준 이사장을 깨워 상황을 알렸다. 최 목사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김 박사, 우리가 죽는 한이 있어도 주일성수는 꼭해야 한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역경의 열매] 김형석 <13> 북, 평양 남북연합예배 당일 대뜸 취소 통보
입력 2017-02-03 0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