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염소가 된 인간] 언덕서 풀 뜯으며… 인간의 짓눌린 무게서 탈출

입력 2017-02-02 17:34
가짜 염소 다리를 팔 다리에 끼우고 염소 무리에 섞여 알프스 산맥을 오르내린 영국 청년 토머스 트웨이츠의 모습. 책세상 제공
여기 염소가 되려는 남자가 있다. 염소 무리에 섞여 네 발로 걷고 뛰면서 험준한 산맥을 오르내리고, 풀을 뜯어먹으면서 연명하고, 염소처럼 세상을 보고 느끼며 ‘진짜’ 염소로 거듭나는 게 남자의 꿈이다. 기상천외하고 황당무계한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남자의 태도는 시종일관 진지하다.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걸까. 답은 책 속에 나와 있다.

“인간으로서 이 세상의 무게에 짓눌린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생각했죠. 잠시 동물이 되면 더 낫지 않을까? 그러면 걱정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제 말은 걱정은 인간이 하는 거잖아요.”

남자가 처음 타깃으로 삼은 동물은 코끼리였다. 하지만 코끼리 코를 만들 방법이 요령부득이었고 코끼리는 왠지 ‘너무 인간적’이라고 여겨져 궤도를 수정한다. 찾아낸 대안은 염소. 책에서는 어떻게 하면 염소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하는 내용이 길게 이어지는데, 일부만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맥락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에, 맥락을 충분히 근본적으로 바꾼다면 우리는 사실상 그 동물이 될 수 있다. (중략) 내가 염소로서 이 세상을 경험하고자 한다면, 가령 의자를 보더라도 자동적으로 앉는 행위를 연상하지 않을 정도로 이 세상에서의 내 맥락을 바꿔야 한다.’

즉, 신체의 움직임을 사족 보행하는 염소처럼 바꾸고 환경도 달라져야 ‘진짜’ 염소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남자는 의수족 제작자나 수의대 교수 등에게 자문을 구한다. 자신의 팔 다리에 끼워 넣는 가짜 염소다리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알프스 염소농장에 도착해 염소 다리를 착용한 뒤 염소 무리에 섞여 언덕을 오르내리며 풀을 뜯어먹으며 사흘을 보낸다. 상상을 현실로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프로젝트의 성패는 어떻게 됐을까. ‘어쩌면 잠시 동안 염소들은 날 염소로 생각했고, 나도 스스로를 염소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중략) 우리가 성공했을까? 거의 그랬다고 봐야겠지.’

남자는 지난해 이 프로젝트로 기발한 연구 성과를 내놓은 인물에게 수여하는 ‘이그노벨상’을 받았다. 남자가 진짜 염소가 될 수 있을까 궁금해서 책을 잡았다가 어느 순간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자문하게 만드는 신간이다. 황성원 옮김.

박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