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인간 본성의 역사] 인간 본성은 善? 惡?… 2500년간 벌인 지식의 향연

입력 2017-02-02 17:32
폴 고갱의 그림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1897). 인간 삶의 수수께끼를 다룬 작품으로 인류의 기원과 정체성 등을 화폭에 담았다. ‘인간 본성의 역사’를 집필한 홍일립은 “(고갱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알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물음일 뿐 그에 대한 어떠한 답변도 아니었다”고 말한다. 에피파니 제공
엄청난 스케일이다. 기원전 5세기에서 출발해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본성은 무엇일까 연구한 동서양 학자들의 스토리를 그러모았다. 책의 분량은 1184쪽. 책장을 넘기고 있노라면 거대한 망루 위에 걸터앉아 인류가 2500년간 벌인 지식의 향연을 감상하는 기분이다.

책에서 다뤄지는 내용 중 주요한 포인트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②인간 본성은 타고나는 것인가, 만들어지는 것인가 ③인간의 ‘본성’이라는 게 과연 있긴 한가.

시대를 주름잡은 동서양 사상가가 차례로 등장한다. 공자 맹자 순자로 이어지는 중국의 고대 사상가 위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연결되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를 포갠다.

통시적으로 이어지던 내용이 근대로 접어들면 이야기는 난수표 같은 철학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사회학 심리학 과학 등 전방위로 뻗어나간다. 비중 있게 소개되는 내용은 진화론을 주창한 찰스 다윈에 젖줄을 대고 있는, 19세기 이후 등장한 학자들이다. 이들은 인간의 본성은 검증 가능한 과학적 사실로만 구성돼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정신주의적 인간학’을 조롱하고 멸시했다. 과학에 의지해 인류의 생물학적 기원을 파고들어갈 때 인간 본성의 실체도 밝혀낼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대표적인 견해 하나만 소개하면 미국의 생물학자 조지 심슨의 발언이다. 그는 “2000여년 동안 철학과 신학에서 핵심을 차지한 주제인 인간은 무엇이라는 질문과 관련하여, ‘종의 기원’이 출간된 1859년 이전에 나온 해답은 모든 가치를 상실했다”고 주장했다. 캐나다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 미국 하버드대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 영국 학자 리처드 도킨스 등도 맥을 같이 하는 학자들이다.

저자는 이들의 주장을 ‘인간 본성의 과학’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엮어낸 뒤 반론을 제기한다. ‘인간 본성의 과학이 내놓은 성과는 뚜렷하지 않다’ ‘가설에 의존한 불확실한 추정이 허다하게 발견된다’ ‘(이전 사상과 비교했을 때) 세계관의 우열의 격차로 해석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인간 본성의 과학’이 창궐하기 이전 시대에 나온 사상가들의 견해에 마냥 동조하는 것도 아니다. 논리의 허점을 지적하면서 수많은 흠결을 꼬집는 내용이 반복된다.

이것은 틀렸고 저것도 잘못됐다는 논박이 이어지니 얽히고설킨 실타래 속에 갇힌 듯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인간 본성을 탐구한 대표적 학문인 신학은 다루지 않는다. ‘종교적 교리에 입각한 인간학적 담론은 신념적 영역의 것이지 사실적 탐구의 대상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해서다. 하지만 신학을 제외한 여타 학문의 유구한 궤적을 되짚는 것만으로도 읽는 재미가 상당하다.

저자는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고 ‘인상주의-모더니티의 정치사회학’(2010) 등을 펴낸 저술가다. 그는 들머리에서 “평범한 일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쓴 글이 아니다”고 못 박고 있다. 하지만 숙독한다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저작일 듯하다. 저자는 5년 넘게 인간 본성의 문제를 부여잡고 몰두한 끝에 이 책을 탈고했다고 한다. 그가 맺음말에 적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알고 있지 못한 것들에 대한 대부분의 답은 아마도 자연 속에 있을 것이다. 나는 인간의 사유와 행위의 역사에서 이 이상의 진실을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자연의 이치에 부합하지 않거나 명백하게 확증될 수 없는 수많은 모든 교설들을 의심한다. 나는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모른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