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노석철] 정경유착의 고리 끊으려면

입력 2017-02-01 17:32 수정 2017-02-01 20:39

SK가 지난해 K스포츠재단의 80억원 지원 요구를 거절한 것은 다시 곱씹어봐도 의문이다. 재단 뒤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있고, 서슬 퍼런 최순실이 배후에서 이미 조율을 한 사안이라는데 무슨 배짱으로 거절했을까. SK 실무진은 독일의 비덱으로 돈을 보내라는 재단의 요구가 워낙 엉뚱하고 석연찮아 이런 저런 구실로 피해갔다고 한다. 집요한 최순실도 “SK가 까다롭게 군다”며 툴툴대다 결국 포기한 모양이다. 이를 두고 SK의 정보력이 떨어져 최순실이란 존재를 모르고 거절했을 것이란 우스갯소리도 있다. 물론 SK 수뇌부에서 종합적인 판단을 했겠지만, 잠시 한눈을 팔았다면 최태원 회장은 궁지에 몰릴 뻔했다. 여러 ‘민원’이 있던 SK 입장에서 추가로 돈을 줬다면 뇌물죄 논란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청와대와 최순실의 부당한 요구에 ‘노’라고 한 사례가 거의 없어 SK의 처신은 눈길을 끈다. 삼성 현대차 롯데 등 기업들 대부분 청와대의 압력을 거스르지 못했다. 이들은 오너가 있고, 늘 약점이 있는 기업들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국민 기업’을 표방한 KT가 부당한 요구에 순순히 따른 것은 계속 회자될 것 같다. KT는 고위직인 전무와 상무 자리에 최순실이 원하는 인사를 앉혔고, 이후 KT는 최씨가 실소유주인 광고 회사 ‘플레이그라운드’에 68억원어치 광고를 몰아줬다. 비선 앞에서 KT의 인사권과 경영권은 무력했다. 황창규 회장은 지난해 2월 대통령 면담에서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가 작성한 KT 스키단 창단 계획서를 받아 실무자에게 검토 지시도 했다고 한다. 최근 KT 사장추천위원회는 8명 만장일치로 황 회장을 차기 회장 후보로 단독 추천키로 했다. 이를 두고 걱정스러운 시선도 적지 않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 전 정권의 후광을 입은 인사들 색출 작업이 진행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권에 알아서 기는 기업들의 고충은 제왕적 대통령 치하의 숙명인지 모른다. 역대 정권마다 기업들은 어떻게 보험을 들어야 하는지 머리를 싸맸다. 사실 한 해 수십조원을 벌어들이는 대기업 입장에서 5년간 무탈하게 사업할 수 있다면 몇 백억원쯤 내는 건 푼돈일 수 있다. 기업들은 그런 먹이사슬 구조에 길들여져 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모두를 범죄의 수렁으로 빠뜨리는 함정일 수 있다. ‘최순실 게이트’에서 기업들은 청와대의 요구를 거역할 수 없었던 피해자라고 항변하고 있다. 그러나 박영수 특검은 양쪽이 돈과 민원을 주고받은 정황이 있어 뇌물죄로 처벌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죄의 유무는 곧 가려지겠지만 정권에 빌붙어 특혜나 챙기는 재벌들이란 부정적 이미지는 두고두고 기업들의 발목을 잡을 것 같다.

따라서 고름이 터진 이때 ‘정경유착’이란 음습한 관행을 어떻게든 바꿔야 한다. 대통령이 기업을 맘껏 주물러도 된다는 생각은 유신시대 사고체계다. 우리 기업들은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하고, 세계에 한류 바람도 거센데 국내 대통령은 아프리카 독재국가 못지않은 행태라니…. 집안 꼴이 이 모양인데 기업들이 해외에서 무슨 낯으로 사업을 벌이겠나.

하기야 박 대통령처럼 모질고 무능한 통치자가 앞으로 다시 나타날까 싶기는 하다. 하지만 대통령제에선 권력과 기업의 ‘갑을 관계’라는 기본 골격은 변함이 없다. 생각이 올바른 대통령이 아니라면 또 사고 칠 개연성이 높다. 차기 대통령이 하지 말아야 할 금기사항은 박 대통령이 적나라하게 보여줬으니 더 설명할 필요도 없겠다. 대통령이 사심이 없으면 기업들도 부정한 방법으로 눈도장을 찍으려 하지 않는다. 대선판에 뛰어든 후보들은 박 대통령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일부에선 죽 쒀서 개 주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던데 흘려들을 얘기가 아니다.

노석철 산업부장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