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지각자들의 연대

입력 2017-01-31 17:26

내가 스트레스를 받는 순간 중 하나로 약속 시간에 지각할 때를 꼽자, 친구가 “설마, 진짜야?” 하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말했다. “그래, 그래서 자주 스트레스를 받지.” 나는 상습 지각생이다. 지각은 이른 아침처럼 부지런을 떨고 긴장해야 하는 시간대보다는 충분히 무리 없는 시간대의 약속에서 자주 발생한다. 그걸 보면 확실히 지각의 가장 큰 원인은 방심인 것 같다. 작은 방심이 5분을 늦게 만들고, 그게 머피의 법칙이라는 윤활유와 만나며 결과적으로는 15분까지 흘러가는 것이다. 결국 나는 정말 억울한 표정으로 약속장소에 들어서게 되는데, 표정관리가 아니라 진짜 억울해 죽겠다. 뭐랄까, 1분 1초가 나를 속인 느낌이랄까.

최근에는 어느 버스에서 내리기 전부터 안절부절못했는데, 지각이 눈앞에 다가오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앱에 따르면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역으로 100m를 걸어 이동한 다음 22분에 출발하는 열차를 타야 했다. 22분 열차를 놓치면 28분에 들어오는 열차를 타야 되는데 그리되면 지각이었다. 버스에서 적어도 16분에는 내려야 할 것 같았으나 버스가 정류장에 닿은 시간은 거의 19분이 다 되어서였다. 나는 1순위로 버스에서 내려(내 뒤에는 한 명밖에 없어서 의미 없는 기록이었다) 달리기 시작했다. 100m를 장애물 경주하듯 뛰어서 겨우 지하철역 개찰구를 통과했는데 이런! 벌써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역시 열차가 방금 떠난 거였다. 지금은 21분이었는데 말이다. 22분에 온다더니 왜 21분에! 억울해서 벽이라도 때리고 싶었는데 숨이 차서 벽을 때릴 힘도 없었다.

결국 지각이구나, 자포자기한 그 순간 저만치서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뭐? 플랫폼에 아무도 없는데 지금 열차가 들어온다고? 지금은 24분인데? 어쩌면 22분 열차가 지각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오묘해졌다. 지각은 지각이 위로하는구나 싶기도 했고 어떤 연대감 같은 걸 느꼈다고나 할까. 열차는 고요한 플랫폼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글=윤고은(소설가), 삽화=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