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표적 신앙의 위험성

입력 2017-01-30 20:29

사도 바울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고전 1:22)라고 말했던 것처럼 유대인들은 표적(signs)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표적에 대한 이해는 턱 없이 부족했습니다. 표적은 실체를 가리키는 이정표와 같습니다. 이정표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이정표 앞에 서 있지 않고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마찬가지로 표적을 올바로 이해한 사람은 표적에 머무르지 않고 표적이 가리키는 실체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표적이 가리키는 실체와 분리해 표적을 이해하거나 표적이 가리키는 실체에 도달하지 못하는 잘못을 자주 범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던 경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요 6:15∼16).

오늘 본문에도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믿음’이란 단어가 나오면 거의 반사적으로 ‘구원’과 연결시킵니다. 물론 사도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은 맞습니다(벧전 1:9). 그러나 이 등식이 항상 성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이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23절은 “믿었다”로 끝나지 않고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24절)라고 돼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음에도 예수님은 왜 그들을 믿으려 하지 않으셨을까요. ‘의탁하지’는 ‘믿었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표적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졌다면 유대인들은 마땅히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표적을 통해 주어지는 유익이 좋아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 이해에 기초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지는 못했습니다.

이는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언뜻 보면 이 말씀은 약속 위반처럼 보입니다. 표적은 예수께서 자신을 믿게 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표적을 보고 예수를 믿었으나 정작 예수님은 그들을 믿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잘못은 예수님이 아닌 유대인들에게 있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고, 유대인들이 가진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도 아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영혼 전체를 주님께 의탁하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그의 몸은 문자적으로 ‘그 자신’입니다.

결국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라는 말씀은 유대인들의 믿음을 예수께서 인정하지 않으셨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께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하는 신뢰로서의 믿음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역사적 인물에 불과하다면 역사적 믿음만 갖고 믿으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역사적 인물 이상의 존재이기 때문에 ‘지식으로서의 믿음’만 가져서는 안 됩니다. ‘신뢰로서의 믿음’을 발휘해 믿어야 합니다. 그와 같은 믿음이 여러분에게 넘치시길 기도합니다.

최덕수 고양 현산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