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전동차 좌석에 앉은 지하철 실버택배기사 박건차(82)씨는 자주 졸음에 겨워했다. 하얗게 센 머리를 덮은 털모자가 자꾸만 바닥 쪽으로 쏠렸다. “명절 대목에다 추위까지 겹치는 바람에 잠이 쏟아져. 요즘은 가끔 내릴 역을 지나칠 때도 있어.” 간신히 정신을 차린 박씨는 멋쩍게 웃으며 지하철에서 내렸다.
실버택배는 65세가 넘은 택배기사가 지하철을 이용해 물건을 배달하는 퀵서비스다. 기사들은 가깝게는 서울에서 멀게는 경기도 천안까지 물건을 당일 배송한다.
기사들에게 명절은 ‘일이 몰리는 시기’다. 쏟아지는 일감 때문에 이번 설 연휴에도 하루밖에 쉴 수 없다. 오랜만에 모인 가족과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빠듯한 시간이다. 그래도 아직 일자리가 있다는 게 큰 위로가 된다.
서울 중구에 있는 ‘실버퀵지하철택배’에는 약 60명의 기사가 있다. 평균 나이 70세. 최고 연령은 제한이 없지만 최저 연령은 지하철을 무료로 탈 수 있는 65세다.
기사들은 보통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7시까지 일한다. 가끔 오후 7시가 다 돼 배달을 맡게 되면 오후 10시까지 일하기도 한다. 건당 받는 돈은 배송비의 70%인 7000원 수준이다.
설 연휴가 낀 이번주 초부터는 일감이 늘었다. 평소 같으면 한 사람이 하루에 3∼4개만 배달하면 되지만 요즘엔 4∼5개도 맡는다.
오후 4시30분. “강변테크노마트로 가”라는 직원의 말 한 마디에 박씨의 세 번째 배달이 시작됐다. 일감이 생긴 박씨가 언제나 마주하는 첫 장애물은 가파른 사무실 계단이다. “65세를 갓 넘긴 젊은이들은 계단도 쉽게 오르내리지만 나처럼 나이가 들면 쉽지 않아.” 기사들 사이에서도 나이가 많은 편인 박씨는 사무실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 박씨는 이동 전에 항상 머릿속으로 지하철 노선도를 그린다. “이쪽 중부 건어물시장을 가로지르면 을지로4가역이 나와. 강변테크노마트라면 거기서 2호선 타고 쭉 가면 되겠네.” 노선 정리를 끝낸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3년차 기사인 박씨도 ‘명절 일감’을 감당하긴 벅차다. 평소 때라면 일주일에 6일을 일하고 목요일 하루는 쉬지만 이번 주는 그마저도 못 쉰다. 박씨는 “사무실도 감당을 다 못할 정도야. 하루에 주문 20건씩은 거절하고 있어”라고 했다.
사무실을 나선 지 40분쯤 지나 박씨는 강변테크노마트 앞에 섰다. 이곳에서 택배를 주문하는 사람을 만나 물건을 건네받은 뒤 목적지까지 배달해야 한다.
택배 고객은 휴대전화 부속품 업체 사장 양건식(30)씨였다. 그는 박씨에게 한 뼘 크기의 작은 상자를 건넸다. 상자 안에는 당일 배송을 부탁한 고객이 주문한 휴대전화 케이블이 들어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상자 겉면에는 택배가 배달될 지역인 ‘여의도’가 검은 매직으로 쓰여 있었다. 물건을 받아든 박씨는 “2호선 타고 가다 왕십리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면 되겠네”라며 다시 발걸음을 뗐다.
박씨는 명절이라고 특별한 기분이 들지는 않는다. “그동안 설이나 추석에도 하루씩만 쉬었어. 명절이 아이들에게나 명절이지 우리에겐 돈만 쓰는 날인데 뭐.”
그래도 가족을 만날 생각으로 들뜬 마음까지 숨길 순 없다. 검은색 패딩점퍼와 터틀넥 스웨터, 솜바지를 입고 털모자까지 쓴 박씨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자식들이 해줬어. 잠바가 얼마나 따뜻한지 요즘 같은 날씨에 밖에 돌아다녀도 추운 줄 몰라”라고 뽐냈다.
종착지인 여의도역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피로는 절정에 달했다. 입 마르고 졸릴 때 하나씩 먹는 땅콩캐러멜을 얼른 입에 넣어봤지만 졸음은 어김없이 쏟아졌다. 여의도역에 도착해서야 간신히 눈을 뜬 그는 “나이가 차면서 언제까지 이 일을 해야 하나란 생각도 자주 들지. 일단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할 생각이야”라고 말했다.
출발 2시간이 지나 도착한 곳은 여의도역 주변 한 안과였다. 이곳에서 택배를 건네고 서명을 받은 뒤에야 박씨 얼굴에 홀가분함이 묻어났다. 택배를 받은 직원 김진광(29)씨는 “명절이 코앞인데 고생하신다”며 “활력 있는 명절 보내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시 거리로 나온 박씨는 힘들어도 아직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버틴다고 했다. “남들처럼 설이라고 마냥 즐겁지만은 않지. 그래도 일자리가 있다는 게 어디야. 그게 큰 위로가 돼서 다시 일하게 돼.” 박씨는 옅게 웃었다.
글·사진=오주환 기자 johnny@kmib.co.kr
[투데이 스토리] “춥지만 일할 수 있어 행복”… 설 앞둔 지하철 실버택배기사의 하루
입력 2017-01-26 16:25 수정 2017-01-26 1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