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하윤해] 염치와 오만

입력 2017-01-26 16:52

대선이 다가오긴 다가온 모양이다. 정권교체, 정치교체, 세대교체 등 교체 슬로건이 전면에 부상했다. 교체는 선거판의 단골 메뉴다. 교체 슬로건들은 1956년 대선에서 야당의 구호였던 ‘못살겠다, 갈아보자’의 손자뻘 정도 되는 셈이다. 교체 말고도 이번 대선을 관통하는 다른 키워드들이 있다. 염치와 오만이 그것이다. 한국적 정서가 배어 있어 외국 선거 전문가들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바른정당과 새누리당에서 염치론을 얘기하는 의원이 적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초래한 보수가 이번 대선에서 승리하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보수가 꼼수나 요행으로 이번 대선에서 승리했다가는 나라가 결딴날 것”이라며 “보수의 정권 재창출보다는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안정성이 더 중요하다”는 설명도 뒤따른다.

범여권으로 불리는 바른정당과 새누리당은 만신창이 상태였다. 잘못을 했다고 무릎을 꿇어도 쇼라는 비판이 나왔다. 가만히 있어도 욕을 먹고, 뭘 해도 진정성이 없다고 욕을 먹는 상황이 이어졌다. 보수의 유일 대안이었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지지율은 떨어지고, 개혁 보수를 자처하는 유승민 의원, 남경필 경기지사의 지지율은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염치론은 어차피 승산이 없으니 명분이라도 쌓자는 차원에서 나온 말인지도 모른다. 유권자들의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다.

인구학적으로 보수 지지 세력이 진보 세력보다 많다는 ‘기울어진 운동장’ 논리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무너졌다. 보수의 집토끼들은 담을 넘어 나갔다. 바른정당 고위 관계자는 “지금 보수 대(對) 진보는 35대 65”라고 진단했다. 반 전 총장이 ‘김종인·손학규·안철수·박지원’에 매달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거에는 보수만 결집시켜도 대선에서 이길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 전략이 먹히지 않는다. 중도 표를 끌어와야 해볼 만한 싸움이 되는 것이다. 최근 들어 백약이 무효였던 보수 진영이 조금씩 꿈틀대는 게 느껴진다.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존하던 상황에서는 벗어난 듯하다. 진보에 오만함이라는 덫을 씌우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기 때문이다.

보수는 야권의 틈을 노린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향해선 “마치 대통령이 다 된 것처럼 행세한다”는 비수를 던진다. 민주당 표창원 의원은 보수의 귀인이다. 표 의원은 자신이 보수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어야 했다. 그는 지난해 총선에서 문 전 대표가 스카우트한 인재 영입 1호 인사다. 보수는 표 의원이 자초한 불씨가 문 전 대표에게 옮겨 붙기를 바라며 애쓰고 있다.

표 의원이 대통령 등 공직에 65세 정년을 도입하자고 주장했을 때 보수의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다. 노인들의 분노를 결집시키려고 했으나 불발탄이 됐다. 곧이어 박 대통령 풍자 누드화 논란이 터졌다. 마초 이미지가 강했던 보수는 페미니즘의 선봉자로 돌변했다. 표 의원은 “표현의 자유”라고 강변했다. 보수는 이 또한 “강남 좌파의 지적 오만”으로 낙인찍기에 바쁘다. 진보에서는 “표 의원만 보면 불안해진다”는 수군거림이 들리고, 보수에서는 “표 의원이 자꾸 떠들었으면 좋겠다”는 키득거림이 흘러나온다. 한국 최초의 프로파일러(범죄심리 전문가)로 유명한 표 의원은 ‘오만 프레임’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찾아야 할 때다. 지금 야권의 적은 반 전 총장이 아니라 오만함으로 비치는 모습이다. 범여권 관계자들은 “정권을 헌납하려고 했는데, 야당에서 받을 생각이 없는 것 같다”고 비꼬고 있다.

하윤해 정치부 차장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