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형석 <10> “구충제 250만정 안되면 사업 관둬라” 北 고자세

입력 2017-01-30 20:34 수정 2017-01-31 10:04
52년 만에 평양을 방문한 실향민 전제현 박종철 장로, 송희준 이화여대 교수(왼쪽 두 번째부터)와 필자(맨왼쪽)가 2000년 3월 30일 모란봉 을밀대에서 추억을 떠올리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17년 전 1월 12일 북한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가 초청장을 보내왔다. 2개월 뒤 3월 13일 중국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런데 조선영사관에서는 평양에서 아직 비자가 나오지 않았으니 다음 기회에 들어가라고 했다. 유감 표명이나 사과도 없이 그 한마디의 통보뿐이었다.

이렇게 한 차례 진통을 겪은 후 서울로 되돌아온 일행은 28일에야 방북할 수 있었다. 김명철 참사는 나에게 공무석(Business Class)을 타라고 권했다. 그런데 내 자리인 1A석에 가니 웬 뚱뚱한 북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조심스런 어투로 “제 자리인데요”라고 말하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옆자리에 앉으라는 눈짓만 했다. 하는 수 없이 1B석에 앉았다. 뒷자리인 2A석에는 우근민 제주 지사가 탑승했다. 우 지사는 제주감귤보내기운동 고문이라는 직함으로 방북했다.

다음 날 개선문 옆에 위치한 평양시 제1인민병원을 방문했다. 북한 측 상대는 소아과 의사인 조선의학협회 장도경 치료예방부장과 평양시 제1인민병원 자순녀 소아과장이었다. 1병원 건물 한 동을 비워 현대식으로 개조한 후 소아과 병동으로 꾸리기로 합의했다. 그런 후 구충제 5만정 지원을 제안했다. 그때 장 부장이 “5만정 가지고 무슨 구충사업을 합니까. 도와주려면 250만정을 도와주고 그렇지 못할 바에는 그만둡시다”라고 했다. 도와주겠다는데 고마운 줄은 모르고 고자세라니. 금세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때 자순녀 과장이 나섰다. “내 말 좀 들어보십시오. 내 나이가 68세인데, 수령님 은덕으로 40년을 소아과의사로 있으면서 아이들에게 제대로 해준 것이 없어 마음이 아픕니다. 요즘은 은퇴하기 전에 한 가지라도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바라는 간곡한 소원을 가지고 꿈속에서도 그렇게 되기를 빌었습니다. 병원시설을 고쳐주는 것만으로 너무 감사하니 구충제는 형편대로 도와주십시오.”

그 얘기가 내게는 특별하게 들렸다. 68세라면…(어쩌면 그녀가 크리스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잠자리에 누웠는데 자 과장의 말이 자꾸 생각났다. 어디선가 음성이 들리는듯했다. “너는 어째서 구충제 도와달라는데 대답하지 않았느냐?” 순간 머릿속이 멍했다. 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 날 아침 북측의 구충제 250만정 지원 요청을 수락했다.

일행이 투숙한 곳은 고려호텔이었다. 1985년 8월 개관한 호텔로서 45층짜리 쌍둥이건물 2개 동이 공중통로를 통해 연결돼 있어 웅장하면서도 멋진 외관을 자랑했다. 그러나 500여 개의 객실은 거의 비어 있었고 실내는 항상 어두침침한 것이 겉과 속이 많이 달랐다.

룸메이트는 전제현 장로였다. 나에게 부모 같은 전 장로는 평양에서의 마지막 날 가슴에 담아둔 얘기를 꺼냈다. “김 박사, 내가 55년 전에 저기 보이는 평양역 시계탑 밑에서 동생과 헤어졌네. 아버지가 ‘장손인 너는 서울 가서 공부하라’고 해서 역으로 왔는데, 동생이 형과 헤어진다고 자꾸만 우는 통에 들킬까봐 동생에게 울지 말라고 구박한 것이 마지막이네. 지금 살았는지 죽었는지, 평양에 있는지 어디 있는지… 도무지 잠이 오지를 않네.” 나는 느낄 수 없는 이산가족의 비애를 들으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