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대법원 “브렉시트 협상 개시하려면 의회 승인 받아야”

입력 2017-01-24 21:22 수정 2017-01-25 00:29

영국 대법원이 정부가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협상을 개시하려면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판결했다. 유럽연합(EU) 단일시장과 관세동맹까지 완전히 떠나는 경착륙 방식의 ‘하드 브렉시트’를 천명한 영국 정부의 계획 앞에 걸림돌이 생겼다.

BBC방송 등은 대법원이 24일(현지시간) 8대 3 의견으로 리스본 조약 50조 발동에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다만 대법원은 EU와의 관계는 영국 정부의 문제이므로 스코틀랜드나 북아일랜드 등 지방 의회의 승인을 별도로 얻을 필요는 없다고 판시했다.

EU의 헌법 격인 리스본 조약 50조는 탈퇴를 결정한 회원국이 유럽이사회에 의사를 통지하면 EU와 해당 국가가 탈퇴 관련 교섭을 2년에 걸쳐 진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이 조약을 발동하는 것이 왕실로부터 위임받은 정부 특권에 해당한다고 주장해 왔다. 반면 한 투자회사 대표와 시민단체 등은 의회 승인을 거치지 않고 조약을 발동할 권한이 정부에 없다며 지난해 10월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정부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부가 가진 특권일지라도 국민들의 권리에 영향을 끼칠 경우에는 예외가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법원장 누버거 경은 EU의 법을 들어내 영국 법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하는 절차를 의회 표결 없이 진행하는 것은 수세기 동안 수호해온 헌법 원칙에 위배된다고 설명했다.

이미 고등법원에서 퇴짜를 맞은 정부에 대법 판단이 뜻밖의 결과는 아니다. 하지만 대법원 결정으로 오는 3월 말까지 50조를 발동하려던 정부 계획에는 제동이 걸렸다. 의회에서 법안 수정을 요구하거나 승인을 지연시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사진)는 대변인을 통해 “대법원 판단을 존중한다”면서도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내용의 성명을 내놨다. 대법원 패소에 대비해온 총리실은 며칠 내로 협상 개시를 위한 법안을 의회에 상정하겠다고 밝혔다. 대법원이 “법안 분량이 매우 짧더라도 그 중대한 의의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만큼 정부는 최대한 빨리 의회 승인을 받아내기 위해 아주 짧은 법안을 준비할 가능성이 크다.

제1야당인 노동당 대표 제러미 코빈은 50조 발동을 막지는 않겠지만 법안을 수정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는 “보수당이 브렉시트를 발판 삼아 영국을 조세회피처로 만드는 것을 막기 위해 법안을 수정할 것”이라며 “단일시장에 대한 완전한 무관세 접근과 노동자 권리 유지 등을 관철하겠다”고 말했다.

일간 가디언은 하원(650석) 230석을 차지한 노동당에서 최대 수십명이 반대표를 던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집권 보수당이 과반인 329명에 달하는 만큼 하원을 통과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전망이다.

전수민 기자 suminis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