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이기호] 부역자 양산하는 나라

입력 2017-01-24 17:34

주변에서 하도 블랙리스트, 블랙리스트하기에 인터넷에 들어가서 조용히 내 이름 석 자를 쳐 보았다. 다행히 내 이름이 있어서 마음을 놓았는데, 으잉, 그게 아니었다. 이름 옆 직업란을 보니 소설가가 아닌 방송인으로 되어 있었다. 아니, 그럼 동명이인이 있단 말인가? 그때부터 바로 고민에 들어갔다.

블랙리스트 작성한 친구들이 헷갈린 건가? 아님, 실제로 방송인 ‘이기호’씨가 블랙리스트에 들어갈 만한 일, 그러니까 ‘문재인 지지’나 ‘박원순 지지’ ‘세월호 시국성명’에 이름을 올렸을까? 물론 그럴 가능성이 더 높아 보였다. 한데, 기억을 되짚어 보니 나 역시 분명 ‘세월호 시국성명’에 동조한 적이 있었다. 그럼, 이건 뭘까? 혹시 나 때문에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방송인 ‘이기호’씨가 차별받는 일을 당하진 않았을까?

나는 책상 위에 메모지를 놓아두고 여러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1. 리스트 작성자가 동명이인이니까 그냥 짜증 나서 한 명으로 묶어둔 것. 2. 예전에 내가 작은 팟캐스트를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냥 방송인으로 적어둔 것(이건 나로선 고마운 일이다). 3. 나의 외모를 보고 방송인으로 착각한 것(이건 바로 지웠다). 내가 계속 그런 걱정 아닌 걱정을 하게 된 까닭은 이번 블랙리스트 건으로 인해 예전엔 전혀 몰랐던 몇몇 사건들을 새롭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세종도서’ 선정 사업이라는 것이 있다. 그해 발간된 시집이나 소설책을 대상으로 우수 도서를 선정, 국가 예산으로 지역 도서관이나 사회복지 시설에 보급하는 사업이다. 2014년, 몇 년에 걸쳐 쓴 장편소설을 발간한 적이 있었는데, 그 소설이 그만 그 사업 심사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당시에는 아, 그렇구나, 내 소설은 역시 후지구나, 하고 말았는데(출판사 직원들은 ‘그건 웬만하면 다 되는 건데요’라고 내 속을 긁었다), 이번에 언론 보도를 보니, 거기에도 어떤 차별과 배제가 작동한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한데 또 이상한 것은 2016년 세종도서 선정 사업에는 그해에 낸 내 책이 선정되었다. 아니, 이게 뭔가? 같은 작가가 쓴 것인데 왜 어떤 소설에는 지원을 안 해주고, 또 어떤 소설은 해주는가? 블랙리스트를 부인하는 쪽은 바로 이런 사례를 두고, 블랙리스트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블랙리스트에 들어 있는 사람 중에도 지원받은 사람들이 꽤 있다, 하는 식이다.

그러나, 하나하나 터져 나오는 증언에 따르면 블랙리스트는 분명 존재하는 게 맞는다. 이 인원이 만 명에 가까우니까, 꼼꼼하고 세심하게 작동하지 못한 예가 있을 뿐, 사람들의 눈과 귀가 쏠리는 사례들에 대해선(그러니까 부산국제영화제 같은 예) 어김없이 철저하게 작동되었다.

아니, 그러면 굳이 만 명이나 되는 사람을 다 관리할 필요가 뭐 있을까? 그냥 상징적인 몇몇 사람들만 관리하면 될 텐데… 관리하기도 힘들고 다 적용하기도 힘들 텐데… 동명이인도 있을 텐데…. 바로 거기에 블랙리스트 작성의 또 다른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블랙리스트라는 것은 블랙리스트에 적힌 사람뿐만 아니라 그것을 작성·관리·적용하는 사람들 또한 확고하게 관리하고 내 편으로 만드는, 수렁 같은 문서이다. 같은 범죄를 저지르고, 부역을 하는 처지로 만드는 것. 그래서 철저하게, 내면까지 체제의 수호자가 되게 만드는 것. 우리는 그런 사례들을 일제강점기 시절 이미 경험한 적이 있다. 블랙리스트가 정말 위험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다수의 부역자를 양산한다는 것. 부역자의 사전적 의미는 ‘국가에 반역이 되는 일에 동조하거나 가담한 사람’이다. 이 정부는 다수의 공무원을 그런 신세로 전락시켰다. 그것이 이 정부의 또 다른 죄다.

이기호(광주대 교수·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