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북 이틀 전 연합뉴스 기자가 찾아와서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딱한 사정을 얘기하고 제발 방문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기사화하지 말 것을 간곡하게 부탁했다.
10월 30일. 서울을 출발한 우리 일행은 선양(심양)과 옌지(연길)를 경유해 라진으로 들어갔다. 숙소인 비파초대소에 짐을 풀자 곧바로 면담하자는 연락이 왔다. 급히 면담장소로 들어가니 분위기가 삼엄했다. 그들 앞에는 ‘문제의 기사’가 펼쳐져 있었다. 제목이 ‘북한, 라진선봉 1년 만에 다시 개방’이었다. 당시 라진은 개발 책임자이던 조선대외경제위원회 김정우 위원장이 총살을 당할 만큼 긴장된 분위기였다. 그날 조선중앙방송에서는 “남조선의 어느 누구도 라진선봉에 들어온 적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제약공장이고 병원이고 다 필요 없으니 당장 싸들고 돌아가시오.” 계속 윽박지르는 그들에게 마음을 가다듬고 제안했다. “아무리 그래도 먼 길을 찾아온 손님에게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도 시간을 좀 줘야 판단할 것 아닙니까.” 30분 후에 회의를 속개하기로 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세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각자 방에 들어가서 기도를 시작했다. 자칫하면 저들에게 억류당할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1년 전 미국 LA에서 온 이광덕 목사도 이곳에서 간첩혐의로 체포돼 103일 동안이나 억류됐다가 풀려난 적이 있지 않은가.
마치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간절하게 기도한 후에 다시 모인 우리는 서로의 입장을 물었다. “그냥 주고 가자”고 의견이 일치했다. 이왕 되돌릴 수 없다면 담대하게 포기하는 것이 후일을 위해서도 낫겠다는 공통된 판단이었다. 재개된 면담에서 재단 입장을 전했다. “우리가 여기 온 것은 북녘 동포를 도우러 온 것입니다. 지원물자를 보낸 순간부터 라진 주민에게 기증한 것인데, 가져가고 말고 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더러 오늘 가라고 하면 돌아갈 것이고, 예정대로 업무를 보고 가라고 하면 일을 보겠습니다.”
우리의 답변에 도리어 그들이 당황했다. 상부와 상의해서 알려주겠다고 말했지만 나흘 일정을 모두 소화할 때까지도 아무런 통보가 없었다. 그 사이 박종철 장로는 선봉군인민병원을 찾아 우리가 보낸 의료기들을 확인했고, 송홍섭 장로는 제약공장 건축 상황을 세밀하게 확인하는 모습으로 북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나흘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날 아침 나는 무역성 맹철호 과장, 라선경제협조회사 엄흥남 사장과 함께 양도확인서에 서명했다.
“그렇게 힘들게 들어와 다 주고 가다니….”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음이 허전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이 충만했다. 두만강에 도착하자 출국수속을 돕기 위해 안내원이 차에서 내렸다. 그때 운전사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선생님. 꼭 다시 들어오십시오. 그래야 우리도 희망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듣자 내 마음에 희망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다.
헤어질 때 맹 과장이 웃음 띤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조심해서 가시고, 중국에 가면 꼭 북경대표부에 전화하십시오.” 1997년 11월 4일 첫발을 디딘 지 2년 만인 99년 11월 3일이었다. 그후 다시는 라진에 가지 못했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역경의 열매] 김형석 <8> 방북 사실 기사화에 北 펄쩍… “당장 돌아가라”
입력 2017-01-24 2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