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그릇·낙관없는 그림… 그 어느 명화보다 진한 감동

입력 2017-01-24 19:05
학문적 도반인 이태호 윤용이 유홍준(왼쪽부터)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가 지난 16일 서울 성북구 리홀 아트 갤러리 개관전인 ‘미술사가들이 사랑한 질그릇과 무낙관 그림전’을 찾았다. 리홀 아트 갤러리 제공
일명 ‘이태호 항아리’. 이태호 교수가 1983년 전남 강진의 옹기 가마에서 직접 구워 그림을 그린 것으로 주인이 돌고 돌아 우연히 2년 전 경매에 나왔을 때 유홍준 교수가 구입했다. 리홀 아트 갤러리 제공
“이봐, 이건 지금 머그잔으로 써도 세련된 디자인이야. 질그릇이 이렇게 모던했어.” “그러게.” “언제쯤 제 대접 받을까. 참 안타까워.”

사진을 찍기 위해 진열장 뒤에서 포즈를 취하면서도 질그릇 예찬론을 쏟아낸다. 허물없이 반말투가 오간다. 평생 모은 소장품 전시회 ‘미술사가들이 사랑한 질그릇과 무낙관 그림전’ 개막일인 지난 16일, 상기된 ‘삼총사’의 표정에서 30대 시절의 풋풋한 열정이 묻어났다.

윤용이(70) 유홍준(68) 이태호(65).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삼총사는 다음 달 ‘막내’ 이 교수가 정년퇴직하면서 모두 석좌교수가 된다. 이들의 인연은 197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순우 관장 시절 국립중앙박물관의 학예사 윤용이·이태호는 이곳을 취재 나온 기자 유홍준과 죽이 잘 맞았다. 이후 1980∼90년대 각각 대구(유홍준 영남대) 광주(이태호 전남대), 익산(윤용이 원광대)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교편을 잡았지만, 한 달이 멀다하고 유 교수의 서울 옥탑방 공부방에 모여 함께 학문적 구상을 이야기했다. 그 성과로 1992년 공저 ‘한국미술사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서’를 내기도 했다.

2002년부터는 명지대 미술사학과를 함께 세워 이끌었다. 분야는 다르지만 모두 현장주의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유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유명한 스타 학자다. 윤 교수는 발굴 성과에 근거해 도자기 편년사를 새로 썼다. 학계가 고려청자 기원을 통일신라 말기로 볼 때 혼자 외롭게 10세기 후반 고려 광종 때라고 외쳤다. 이 교수는 초상화 풍속화 등 전통 서화 속의 사실주의 정신을 천착했다. 학생들을 끌고 전국 유적지를 답사하고 서울 인사동 고미술상을 투어하는 열정은 소문이 자자하다. 전시회에 나온 180점의 질그릇과 20여점의 무낙관 그림은 그렇게 40여년 현장을 훑어온 ‘학문적 도반’의 우정의 징표 같은 것이다.

유 교수는 “미술사의 현장이라 할 그곳에서 한국 미술사의 시각지대를 봤다. 민예품, 질그릇, 무낙관 그림들에서 느끼는 미술사적 감동을 교감하며 원고료 강의료를 아껴 구입해 연구실에 두고 정을 나누었다”며 “그런데 30년 전 50만원에 산 질그릇이 지금은 30만원에 팔리는 이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냐”며 안타까워했다.

윤 교수는 “선사시대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회색 질그릇 속에는 단순함과 고요함에 대한 추구가 도도하게 흐른다”고 거들었다. 이 교수는 “이 정교한 나비 그림 보세요. 도장만 찍으면 영락없는 남계우(나비그림으로 유명해 별명이 ‘남 나비’)것”이라며 “회화성이 뛰어난 무낙관 그림을 보면 흙에서 옥을 캐듯, 회화사의 한 귀퉁이를 채워 넣는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전시장 한 켠, 능수버들을 그린 옹기가 시선을 끈다. 이 교수가 1983년 전남 강진에 학생들과 농활을 가 항아리를 구울 때 ‘상감기법’으로 만든 거란다.

“누구에겐가 선물을 했었는데, 그게 돌고 돌아 2년 전 경매에 나왔더라. 유 교수가 ‘이태호 동생 꺼’라고 구입해 이번에 내놓았다”고 자랑했다.

전시는 명지대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만학도인 인쇄업체 경림코퍼레이션 리우식(65) 대표가 서울 성북구에 세운 ‘리홀 아트 갤러리’(관장 이원주) 개관전이다. 선뜻 애장품을 내놓아 제자의 갤러리 개관전을 열어준 것이다. 학문적 도반의 우정만큼 사제 간의 정이 흐르는 전시다. 오는 2월 15일까지(02-336-6877).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