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이슈] ‘중동 화약고’에 ‘트럼프 도화선’?

입력 2017-01-24 05:01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이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지난해 9월 25일 뉴욕 맨해튼 트럼프타워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만나 악수하고 있다. 두 정상은 22일(현지시간) 전화통화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를 강화하기로 뜻을 모았다. AP뉴시스
무장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지난해 11월 7일 팔레스타인 자치령인 요르단강 서안(웨스트뱅크)의 유대인 정착촌에서 팔레스타인 시위자들에게 최루탄을 쏘고 있다. AP뉴시스
최근 세계무대의 중심에서 펼쳐진 장면들은 '중동의 화약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을 둘러싼 높은 벽을 여실히 드러냈다.

지난 15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중동평화회담에서 세계 70개국 외교관들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자치령 내 정착촌 건설을 비판하며 기존 평화 원칙인 '두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이 이·팔 분쟁의 유일한 해답임을 재확인했다. 두 국가 해법은 이·팔이 서로를 인정하고 평화로운 공존을 추구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갈등의 당사자인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 회담을 가리켜 '어제의 마지막 몸부림'이라며 "내일의 세계가 당도했다"고 말했다. 친(親)이스라엘 성향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거는 기대를 숨기지 않은 것이다.

극우 강경파 유대인을 이스라엘대사로 지명한 트럼프는 주이스라엘 미국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을 기정사실화하면서 팔레스타인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지난 20일 미국 대통령 취임식 직후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은 성명에서 "뒤숭숭한 세계와 비극적인 시대 아래서 평화와 안보, 안정을 위해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일하길 바란다"고 우려를 드러냈다. 반면 레우벤 리블린 이스라엘 대통령은 서한을 통해 축하 인사말과 초청의 뜻을 전하며 트럼프의 취임을 크게 환영했다. 예측불가 트럼프 시대를 맞아 가까스로 균형추를 맞춰온 평화가 다시 위기에 직면한 모습이다.

시온주의와 6일 전쟁

이·팔 갈등의 도화선은 1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1917년 1차대전 당시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는 유대 자본의 힘을 빌리기 위해 팔레스타인으로 불리던 지중해 연안 중동 지역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약속했다. 이 밸푸어 선언으로 시오니즘(유대인 민족주의 운동)에 불이 붙었다. 나치 독일 치하에서 모진 박해를 견딘 유대인은 2차대전 종식 후 민족국가 건설을 추진했다. 47년 유엔총회는 유대인 국가와 아랍 국가를 건설한다는 내용을 담은 ‘팔레스타인 분할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듬해 이스라엘은 건국을 선포했다.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70년간 거듭된 갈등은 중동을 언제 터질지 모를 화약고로 만들었다. 67년 벌어진 6일 전쟁(3차 중동전쟁)에서 압승을 거둔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이어 시나이 반도와 가자지구, 골란고원, 요르단강 서안(웨스트뱅크)을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으로부터 각각 빼앗았다. 전쟁은 6일 만에 끝났지만 이 땅을 둘러싼 무력 충돌은 끊임없이 계속됐다. 이스라엘이 가한 가혹한 탄압은 대규모 민중봉기로 터져 나왔다.



인티파다와 오슬로 협정

아랍어로 봉기, 각성, 반란 등을 뜻하는 ‘인티파다’는 팔레스타인의 반(反)이스라엘 무장투쟁을 일컫는다. 87년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청년 4명이 이스라엘 군용 트럭에 깔려 숨졌다. 이 사건으로 촉발된 인티파다는 팔레스타인의 위태로운 현실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93년 당시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은 백악관에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슬로 평화협정(팔레스타인 잠정자치에 관한 원칙 선언)에 서명했다. 라빈 총리와 아라파트 의장, 클린턴 대통령이 백악관 잔디밭에서 환하게 웃으며 악수하는 모습은 첫걸음을 내딛는 중동 평화를 상징했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비밀 협상을 주도한 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대통령(당시 외무장관)은 라빈 총리, 아라파트 의장과 이듬해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이 오슬로 협정에서 ‘두 국가 해법’이 천명됐다. 이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가 요르단강 서안에 수립됐다.

정착촌 건설과 네타냐후

오슬로 협정 체결 이후 20여년이 지났지만 이·팔 분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갈등의 원인은 이스라엘 정착촌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령에 유대인 마을을 끊임없이 건설했다. 이 정착촌은 팔레스타인 각 지역을 섬처럼 나누고 고립시켰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UNOCHA)에 따르면 83년 10만6500명이던 정착촌 인구는 2014년 77만1000명으로 크게 늘었다.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착촌을 확대했다. 이에 팔레스타인이 무력 투쟁에 나서고 이스라엘이 군사 보복을 가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오슬로 협정과 두 국가 해법은 사실상 좌초됐다. 오슬로 협정의 당사자인 라빈 총리가 95년 이스라엘 극우파에 암살됐고 팔레스타인 내부에서도 강경파가 타협을 거부한 채 테러를 일으켰다. 지난 9월 페레스 대통령마저 사망하면서 중동 평화의 동력도 사라졌다. 팔레스타인의 자살 폭탄테러와 이스라엘의 무력 진압이 이어지면서 인티파다가 재발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2009년부터 집권 중인 네타냐후 총리는 초강경 자세로 팔레스타인에 맞서고 있다. 끊임없이 건설되는 정착촌에 팔레스타인의 분노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네타냐후 총리는 두 국가 해법을 지지해온 국제사회와 갈등을 빚고 있다. 지난달 23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는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에서 정착촌 건설을 중단할 것을 이스라엘에 촉구하는 결의안을 찬성 14표, 반대 0표, 기권 1표로 통과시켰다. 거부권을 행사하면 결의안 채택을 막을 수 있었던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미국은 기권을 선택했다. 이스라엘은 자국 주재 미국대사를 불러 거세게 항의하는 등 당시 버락 오바마 행정부를 규탄했다.

트럼프의 미대사관 예루살렘 이전 논란

이·팔 간 균형외교를 펼친 오바마 행정부와 달리 트럼프는 주이스라엘 미국대사관 이전을 공언하며 노골적인 이스라엘 편들기에 나섰다. 이스라엘 당국은 트럼프 취임에 맞춰 동예루살렘의 유대인 정착촌에 신규 주택 566채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이스라엘과 밀월 관계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백악관은 22일 “트럼프 대통령이 네타냐후 총리와 양국의 특별한 관계를 강화하는 방안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네타냐후 총리와의 전화 통화에서 “이·팔 평화는 당사자가 직접 협상할 문제다. 이를 위해 미국은 이스라엘과 긴밀하게 협력하겠다”고 말했다. 이스라엘 총리실은 “두 지도자가 매우 따뜻한 대화를 나눴다. 중동 평화와 안보 증진을 위해 뜻을 모았다”고 밝혔다. 네타냐후 총리는 다음 달 초 미국을 방문해 트럼프를 만날 계획이다.

이런 가운데 주이스라엘 대사로 임명된 랍비(유대교 율법학자)의 아들인 극우파 데이비드 프리드먼에 대한 우려가 더욱 커지고 있다. 트럼프는 주이스라엘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전하겠다는 프리드먼의 계획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대사관 이전 방침은 거센 반발에 휩싸였다. 팔레스타인 측은 지난 10일 “미국이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며 “오슬로 협정에서 합의한 이스라엘 인정 문제를 전면 재검토하는 방안을 고려하겠다”고 날을 세웠다.

예루살렘은 기독교는 물론 유대교, 이슬람교 등 세 종교의 성지다. 유엔은 서예루살렘과 동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영유권을 각각 인정한다. 하지만 미국대사관 이전에서 드러나듯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전체를 수도로 삼으려 한다. 향후 국가로 인정받으면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으려 하는 팔레스타인은 이를 결사반대한다는 입장이다.

트럼프 행정부와 이스라엘은 이란 핵협상이 초래할 위협에 함께 대처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미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에 치우친 트럼프의 행보에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백악관 선임고문으로 중동 문제를 전담할 트럼프의 유대인 사위 재러드 쿠슈너도 갈등의 한 원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시대를 맞아 이·팔은 물론 중동 평화가 또다시 위협받고 있다.

신훈 기자 zorba@kmib.co.kr, 그래픽=박동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