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박맹호 회장 별세… “책은 인간의 DNA”

입력 2017-01-22 21:21

박맹호(84·사진) 민음사 회장이 22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50년 넘게 한국 출판 산업의 중심에 서 있었던 박 회장은 한국 출판계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출판인의 가장 든든한 뒷배였다.

1933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난 고인이 출판계에 투신한 건 66년 서울 종로구 청진동 옥탑방 사무실에 민음사를 창립하면서다. 창립 첫해 내놓은 인도 요가책 ‘요가’는 2만권 가까이 팔리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민음사는 단행본 출간과 신진 작가 발굴에 주력하면서 출판계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70년대에는 시인 고은, 문학평론가 김현 등과 힘을 합쳐 ‘세계 시인선’ ‘오늘의 시인 총서’를 펴내며 시집 대중화에 기여했다. 76년에는 계간 문학지 ‘세계의 문학’을 창간했고 ‘오늘의 문학상’을 제정했으며 81년에는 ‘김수영 문학상’을 만들었다. 고은 김수영 이청준 이문열 같은 문인들은 민음사를 통해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출판 산업에서 소외됐던 학술 서적 발간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이데아 총서’ ‘대우 학술 총서’ ‘일본의 현대 지성’ 등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고인은 민음사를 통해 5000종 넘는 책을 내놓았는데, 그의 발 빠른 시도는 출판계를 선도할 때가 많았다. 70년대 시집을 내놓을 때는 최초로 가로쓰기를 시도했다. 독자에게 친숙한 국판 30절 형태의 시집 판형도 ‘오늘의 시인 총서’를 통해 처음 시도된 것이다.

창립 30주년을 맞아 95년부터 기획한 ‘세계문학전집’ 역시 출판계에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다. 이 시리즈는 미국과 서유럽 중심이던 기존 문학 전집과 달리 제3세계 작가를 소개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고인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첫 책을 내놓은 것은 우리 나이로 여든 살을 맞은 2012년 12월이었다. ‘책’이라는 제목이 붙은 자서전이었다. 당시 그는 기자간담회에서 “책은 인간의 DNA”라고 말했다.

2005년 대한출판문화협회 제45대 회장에 당선돼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한국 주빈국 행사를 담당했다. 출판 산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무총리 표창’(1982) ‘대통령 표창’(1985) ‘보관문화훈장’(2006) 등을 받았다. 인문학 발전을 위한 기금으로 2001년과 2008년 서울대에 각각 3억원, 2억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위은숙씨와 상희(비룡소 대표이사) 근섭(민음사 대표이사) 상준(사이언스북스 대표이사)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 발인 24일 오전 6시(02-2072-2020).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