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레드 아미 코러스와 검열의 시대

입력 2017-01-23 00:00
‘레드 아미 코러스’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알렉산드로프 앙상블. 냉전시대에도 뛰어난 예술성으로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명성을 누렸다. 우리나라에선 공산국가인 구 소련 출신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그들의 음악이 금지목록에 올라있었다. AFP뉴시스

지난 연말 러시아군 수송기 추락 사고는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비통한 뉴스였다. 사망한 탑승자 중 60여명이 바로 알렉산드로프 앙상블 단원이었기 때문이다. ‘레드 아미 코러스’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 친숙한 이 합창단은 1928년 당시 소련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현역 군인을 중심으로 창단됐다. 2차 대전 중에는 최전방 부대를 포함해 전장에서 1500회 이상 공연을 펼치며 군인들의 사기를 드높였다. 이번 사고도 시리아에 파견된 러시아 군의 위문 공연을 가다가 벌어진 참변이었다.

레드 아미 코러스는 냉전 시대에도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위대한 명성을 누렸다. 남성 보컬 특유의 장엄한 사운드, 러시아 특유의 서늘하고 깊은 정서, 여기에 일사분란하면서도 힘찬 군무가 어우러진 퍼포먼스는 소련 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인기가 높았다. 1937년 프랑스에서 열린 국제 예술박람회에서는 그랑프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들은 혁명군가 이외에 러시아 민요를 세계에 널리 알리며 ‘소련의 노래하는 문화병기’로 각광을 받았다. 적성국가인 미국과 서유럽에서도 이들의 음반이 널리 유통됐다. 특히 이들이 부른 ‘볼가 강의 뱃노래’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차트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 노래를 오랫동안 들을 수도, 노래할 수도 없었다. 금지곡이었기 때문이다. 강에서 배를 끄는 노동자들의 노동요가 냉전사상과 관련 있을 리 만무했다. 금지 사유는 단 하나, 볼가 강이 공산국가에서 흐르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박정희 독재시절 제정된 문화공보부령 ‘음반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과 ‘공연윤리규정’은 적성국의 작품이나 적성국민의 표현물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법령에 따라 레드 아미 코러스는 물론 소비에트 출신의 작곡가인 쇼스타코비치, 하차투리안,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을 녹음한 음반은 국내 반입이 철저히 금지됐으며 당연히 연주도 불가능했다. 모스크바 필, 상트페테르부르크 필(구 레닌그라드 필)의 공연은 물론 그들의 음반조차 구경할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이 금지법령은 1983년 ‘공산권국가 순수음악 음반허용기준’으로 일부 해제되기 시작해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동구권과 본격적인 수교가 이뤄지면서 대부분 해제됐다. 1991년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된 레드 아미 코러스의 첫 내한 공연에 한국 관객은 전석매진으로 뜨겁게 화답했다.

1970∼80년대 해외 출장 중 국가보안법 위반을 무릅쓰고 구입한 레드 아미 코러스 LP 음반을 숨기고 김포공항 검색대를 통과한 무용담은 1990년대에 이미 진부하다 못해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나라의 이야기가 되었다. 모스크바 필, 부다페스트 오케스트라, 체코 필, 상트페테르부르크 필 등 과거에는 한국 무대에서 구경조차 할 수 없던 동구권 악단들이 이제 정기적으로 한국 무대를 찾는다.

스탈린이 사랑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이 한국 오케스트라에 의해 공연장에서 연주되고 있는 오늘날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좌파 예술가’들의 블랙리스트가 몰래 유통되고 있었다고 한다. 법도 국민도 벌써 한참 전에 지나간, 심지어 낯설어진 금지와 검열의 시대에 아직까지 머물러 있는 이 정부의 후진성에 배신감보다는 자괴감이 든다.

화려하고 비일상적으로 보이는 공연예술계 이면에는 부끄럽고, 뿌듯하고, 우울하고, 때로는 유머러스한 우리 한국 사회의 이면이 은밀하게 아로새겨져 있다. 현재는 과거의 거울임을 되새기며 국민일보가 마련해준 연재 칼럼을 통해 한국 공연예술계에 새겨진 우리의 자화상을 차근차근 단편적으로 짚어보고자 한다.

■필자 노승림은…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및 음악 칼럼니스트. 월간지 '객석' 기자와 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워릭대에서 문화정책학 석·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숙명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나와 당신의 베토벤'(공저) 옮긴 책으로는 '페기 구겐하임' '음악과 권력' '평행과 역설'이 있다.

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