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노트] 적성

입력 2017-01-20 17:50
어둠을 밝히는 빛

나는 이과 출신이다. 의사가 되려고 선택했던 건 아니다. 아버지는 공대, 어머니는 생물학을 전공했다. 고1이 끝날 무렵 문과를 가겠다고 했더니 부모님은 반대하셨다. 반항을 모르던 나는 속이 상했지만 이과를 선택했다. 그런데 수학이 발목을 잡았다. 영어와 국어는 성적이 그런대로 나왔지만 수학은 버거웠다. 마치 노력으로도 넘을 수 없는 벽처럼. 수학은 내게 엄지발가락 깊숙이 박힌 가시였다. 걸을 때마다 아팠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정신과 의사가 된 후 좀 편해졌다. 더 많이 읽고 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숫자보다 글자에 친숙한 내 적성이 정신과 의사 노릇에 걸맞았다. 핏(fit)이 잘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랄까. 비록 적성에 안 맞는 이과를 선택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살다보니 어느 순간 기질에 맞는 일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고, 지금은 그걸 하며 살고 있다.

고교 때 문과를 선택해 대학에서도 문과 계열을 전공했다면 지금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적성에 맞는 선택을 했으니 행복했을까? 대학 졸업 무렵 외환위기가 터졌으니 직장 구하는 데 애를 먹지는 않았을까?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도 세상이 나를 받아주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상상도 해 본다. 나는 어떤 일을 잘할 수 있을까? 어떤 적성을 갖고 있을까? 정말로 좋아하는 일은 뭘까? 이런 고민도 중요하다. 하지만 세상을 충분히 경험해 보기 전에 자신에게 딱 맞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다. 머리만 이리 저리 굴려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때로는 잘 맞지 않는 일에도 최선을 다해 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평소에 쓰지 않는 근육도 운동해서 키워둬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삶이 계획한 대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다. 또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정답을 찾게 될 때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도 되돌릴 수 없다면 일단 그것에 최선을 다해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슴에 품고 끝까지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런 일이 운명처럼 찾아올 것이다. 어쩌면 부모님은 30년 전에 학문의 융합과 통섭의 진리를 내다보고 문과 적성인 나를 이과로 보낸 것은 아닐까. 이제 와서 새삼 부모님의 혜안에 고마움이 느껴진다.

김병수(서울아산병원 정신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