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다. 종교개혁이 시작된 1517년 유럽처럼 우리 사회도 전면적인 개혁 요구가 폭포처럼 분출하고 있다. 국민일보와 국민일보목회자포럼은 19일 김황식 전 국무총리와 박종화(경동교회 원로목사) 국민문화재단 이사장을 초청, 종교개혁 500주년이 현재 한국에서 갖는 의미와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을 짚어봤다.
사회=김경문 목사(순복음중동교회)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시대 상황은 무엇이었나.
△박종화 이사장=15세기에 기존의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뒤흔든 사건들이 있었다. 우선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 교회에 충격을 주었다. 중세 유럽인들은 터키와 스페인이 동서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지리상의 발견이 세계관과 우주관을 바꾸었다. 이에 따라 기독교가 미치는 범위가 전 세계로 확대돼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지동설 등 근대 과학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타락이다. 하지만 자동적으로 이에 대한 반작용이 일어난 게 아니다. 르네상스(문예부흥)로 대표되는 예술과 문화의 전환이 바탕이 됐다. 맹목적 신앙 위주의 교회 가르침에 대한 거대한 도전이었다. 인문주의 사상과 창조적 사고의 발달. 이것이 교회로 하여금 무지몽매한 가르침에서 나오게 했다.
△김황식 전 총리=주지하다시피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가 본래 역할을 못하고 부패·타락했다. 교회가 면벌부(면죄부)를 사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잘못된 가르침까지 폈다. 극에 달한 교회의 권력화, 세속화가 마르틴 루터가 개혁에 나설 수밖에 없게 했다. 우리 사회에서도 바람직한 가치와 질서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당시 종교개혁과 같은 움직임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만 해도 기본적으로 법치주의를 파괴한 데 따른 것이다. 법에서 전혀 정하지 않은 제3자가 국정에 가입하고 그 과정에서 사익을 추구했다. 또 나라를 법치주의 원칙에 따라 이끌어가야 할 대통령과 관료들이 직간접적으로 이 과정에서 역할을 했다. 법치·공정사회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분노를 촉발했다. 어떤 사회나 시대든지 중요한 소임을 맡은 사람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는 반드시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개혁의 움직임 목소리 나올 수밖에 없다.
-종교개혁 당시 드러난 권위 상실, 무질서, 가치 전도 등이 우리 사회에서도 여러 병리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뒤 이은 촛불 시위는 어떻게 봐야 하나.
△김 전 총리=촛불민심이라는 것이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직접민주주의의 저항이라는 성격이 있다.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역할·작동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민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는 사태가 발생했다. 저는 대의민주주의가 우리 정치체제의 기본이기 때문에 대의적 방식을 통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게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직접민주주의가 작동한다는 것은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고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할 소지가 있다. 이번 최순실 사태와 뒤이은 촛불시위의 경우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발생한 어쩔 수 없는 현상인 측면이 강하다. 하지만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사회·정치 지도자들이 시민들이 광장으로 나와서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될 그런 역할을 충분히 하는 게 중요하다.
△박 이사장=이번 사건과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교회 사정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많다. 중세를 지배하던 교권과 백성 사이에는 교감과 소통이 없었다. 성직자의 타락이 심각했다. 교황이 자식까지 낳았고 교황직을 세습하려 했다. 소통의 창을 뚫으려면 권위주의 체제에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루터가 요구한 95개조는 요즘의 촛불이다. 촛불의 내용은 단 두 개다. 바꾸자, 그리고 ‘모든 백성이 하나님 앞에 참된 신앙을 세우자’이다. 교회가 교회이게 하자는 것이다. 교회는 성직자가 하나님 말씀을 대신 전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대의체제인데 당시 가톨릭은 전혀 신자와의 소통이 없었다. 성직자와 지도자는 백성을 섬겨야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루터는 당시 교회의 치부를 드러내는 동시에 새로움을 드러내는 두 가지 행위를 해야 했다. 교회가 결국 새로움을 드러내지 않으니까 개신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 당시와 오늘 우리 현실이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도 종교개혁과 같은 현상이 진행 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어떤 방식으로 개혁이 진행돼야 하나.
△박 이사장=종교개혁은 ‘종교혁명’ 아니고 ‘개혁’이었다. 지금 한국의 상황도 혁명이 아니고 개혁이어야 한다. 긍정적인 것으로의 개선과 아울러 새로움의 창조, 개선과 창조가 같이 가야 한다. 개선 없는 창조는 사상누각이며 창조 없는 개선은 수구(守舊)일 뿐이다. 이 두 가지를 아주 지혜롭게 적용하고 잘 끌어간 것이 종교개혁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기독교와 세계가 망가지고 대안이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도 이만큼 성장했으면 고칠 것은 과감히 고치고, 세울 건 세우자. 다만 장점을 살려서 창조적으로 계승해 가야 한다. 사회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다. 개혁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했으면 한다.
△김 전 총리=1517년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던 비텐베르크에는 루터박물관이 있다. 거기에 돈 궤짝이 있는데 주로 복지와 의료를 위해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궤짝을 열려면 교회와 지방정부, 시민단체가 각각 열쇠를 가져와 함께 열어야 했다. 루터의 개혁 이후 여러 세력이 협력해서 사회를 운영하던 관행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이다. 박 이사장님 말씀대로 현안을 개인과 기관, 여러 세력이 힘을 합쳐서 제자리로 모든 것을 돌려놓는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모든 것을 부수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식은 위험하다. 기존 가치 중에서 좋은 것을 그대로 살려가면서 점진적인 변화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좋은 헌법과 법률, 제도를 갖고 있다. 촛불 시위가 법치주의가 깨진 데 대한 분노였다면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도 법치에 합당한 방식이 돼야 한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차분히 기다리고 결과를 존중해야 한다.
-평상시에도 그렇겠지만 지금 같은 비상한 상황에서 지도자의 자질, 철학이 매우 중요한 것 같다.
△박 이사장=우리가 지도자로서 존경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공공이익, 공공선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가톨릭은 편협했다. 워낙 핍박하니까 위그노파가 집단적으로 이주한 곳이 영국이었는데 이 사람들이 초기 산업혁명의 주역이 됐다. 프랑스 사람들이 나중에 “우리 마음이 너무 좁아서 개혁 세력을 수용하지 못했다”고 후회했다. 다양한 가치를 품어서 새로운 사회에 참여하도록 하는 게 진정한 지도자이다. 한국이 창조적 다양성이 뭉쳐서 교향곡 같은 화음을 내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그게 참된 법치국가일 것이다. 루터가 외친 ‘성서로 돌아가자’도 결국 법치에 대한 존중을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중세엔 법치의 원전이 성서였으니까. 제가 오케스트라를 좋아하는데 악기가 다르고 구성도 다르다. 하지만 지휘자는 연주자들이 제각기 악기를 불게 하면서 화음을 만들어 낸다. 악기마다 특징이 있으니 연주자는 정확히 불면 된다. 화음을 만드는, 오케스트라 지휘자 같은 지도자가 다음 대통령이길 바란다.
△김 전 총리=대통령은 기본적인 도덕·윤리성을 갖춰야 한다. 그리고 다양한 국정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전문성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복잡다단한 사회의 여러 세력, 모든 국민을 품을 수 있는 포용적 리더십이다.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들 얘기도 충분히 듣고 소통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생각을 바꾸기도 해야 한다. 상대방을 간곡히 설득하는 노력을 통해 모든 국민이 함께 어깨동무하고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갈등이 팽배한 지금 현실에서 이런 리더십이 정말 중요하다. 역대 대통령들도 노력했지만 알게 모르게 지역, 이념, 그리고 다른 불합리한 요소로 편 가르기가 된 게 사실이다.
-국정 리더십이 공백인 가운데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 안보 정세가 긴박해지고 있다. 외교안보 리스크가 경제 리스크로 전이되는 양상도 나타나고 있다.
△김 전 총리=외교 국방 현안에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원칙이다. 국제규범에 맞게 행동해야 하고 그런 국제규범 속에서 국익을 최대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국제규범과 국익 최대화를 양대 원칙으로 정치인들이 확실한 철학과 소신을 갖고 밀고 나가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 정보와 관련 지식이 부족한 일부 국민들은 외교안보 사안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려는 경향이 있다. 정치인들은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정말 국익에 어떤 것이 가장 바람직한지 냉철히 판단해야 한다.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지 항상 자기점검 해야 한다. 콘라드 아데나워, 빌리 브란트, 헬무트 콜 총리 같은 분들이 있어서 독일이 통일됐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분들의 공통점이 포퓰리즘에 빠지지 않고 국민들을 설득해서 ‘평화적 독일 통일’이라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통찰력과 리더십이다. 이는 진보와 보수와 상관이 없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국가 정책이 함부로 바뀌어서는 안 된다. 부분적인 조정과 조절은 할 수 있지만 과거 정부 것이라고 무조건 쓸어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외교 분야에서 이것은 금물이다.
△박 이사장=통일정책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바뀐다. 지난 정권 정책은 일단 무효로 하려한다. 그나마 그동안 우리 국력이 있어서 버텼지 아니었으면 이미 큰 불안에 빠졌을 것이다. 독일이 성공적으로 통일을 이룬 데는 연합정부(연정)의 역할이 컸다. 연립하다 보니 책임과 비판을 공유했다. 정책결정 과정에서도 당파적 이익보다 통합적 이익을 우선했다. 대통령제에서 연정이 쉽지 않을 수 있지만 통일정책만이라도 국민 여론의 합일, 정파 간 공감대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은 기본이다.
△김 전 총리=사드 배치와 한·일 위안부 합의 등과 관련해 정부도 나름의 고민이 있었고 여러 가지 국익을 고려해 결정했을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과정에서 소통하고 국민을 설득하는 노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는 어떤 측면에서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한 시스템이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통일정책에서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것은 정말 잘못됐다고 본다. 북한은 법률적으로는 한국을 적화통일하려는 반국가단체다. 한편으로는 한 민족으로서 통일을 이뤄야 하는 상대이다. 우리는 투트랙(양방향) 정책을 쓸 수밖에 없다. 북한이 언제 도발하더라도 이를 퇴치하고 사전에 억제할 수 있는 힘을 확실히 키워야 하지만 외교부와 통일부는 포용하며 대화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 국방 대비와 대화 협력 양쪽 노력을 병행하는 기조를 유지하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햇볕정책과 봉쇄정책을 오갈 필요가 없다. 아무리 북한이 납득할 수 없는 그런 강고한 예외적 체제라고 하더라도 대화의 끊을 놓아선 안 된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가 맡아야 할 시대적 역할은 무엇인가.
△김 전 총리=국민들의 의견과 욕구는 늘어나고 사회현상은 점점 복잡다기해지는데 이런 과정에서 생기는 많은 문제를 정부가 다 해결할 수는 없다. 공공부문 밖의 종교나 언론 등 시민사회가 함께 힘을 합쳐야 한다. 저는 종교가 그 역할을 많이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공의가 넘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기독교인들이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고 자기헌신을 보여주면 국민들은 기독교를 더욱 높이 평가할 것이다. 어릴 때부터 지덕체 교육을 통해 심성을 가꿔줘야 한다. 청년들에게도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차별하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이며 소명이라는 인식을 갖게 해야 한다.
△박 이사장=정당끼리의 연정뿐 아니라 정부와 민간도 협치와 비판적 연대를 해야 한다. 많은 국민이 깨어서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왔다. 생활 속에서의 복지, 교육 문제 등에서도 정부와 국민이 터놓고 대화해야 한다. 교회와 정부도 같이 협의할 여지가 많다. 독일의 마이스터 제도처럼 기능직에 대해서도 자긍심을 갖도록 하는 풍토를 만들 필요가 있다.
▨ 박종화 목사는
1945년 충남 보령에서 출생했다. 한신대 신학과와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ThM)을 졸업하고 독일 튀빙겐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1991∼2006)과 한국기독교장로회 총무(1994∼1999), 경동교회 담임(1999∼2015),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총재, 대한기독교서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현재 국민문화재단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국민훈장 모란장과 독일십자공로훈장 등을 수훈했다. 저서로는 ‘평화신학과 에큐메니칼 운동’ ‘인간화’ ‘칼 바르트’ 등이 있다.
▨ 김황식 전 총리는
이명박정부의 마지막 총리이며 재임 기간 중 29회의 간담회와 190차례의 현장방문을 추진해 ‘소통의 총리’라 불렸다. 대한민국 최초의 광주·전남 출신 총리로 역대 네 번째 장수 총리이자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도입 이후 최장수 총리(2년5개월)다.
광주일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72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2008년 대법관 임기를 마칠 때까지 30여년간 판사의 길을 걸었다. 합리적인 중도보수 성향으로 감사원장을 거쳐 2010년 총리로 지명됐다.
정리=고승혁 기자, 사진=김지훈 기자
[한국의 길을 묻는다] “현 시국 종교개혁 때와 비슷… 국민들 광장 안 나오게 해야”
입력 2017-01-20 05:04 수정 2017-01-20 1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