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형석 <5> “북한 사람들 주세요” 장갑 30켤레 건넨 노점 할머니

입력 2017-01-19 20:18 수정 2017-01-20 00:52
1998년 1월 유라시아 철도의 출발점인 라진역에서 털모자를 쓴 일행들. 왼쪽부터 필자, 안승도 집사, 박은조 목사, 심성우 최동규 집사.

재단이 설립되고 전국적인 조직을 결성했지만 고향마을이 좌초되자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박세록 장로가 북한 라진선봉경제무역지대에 제약공장을 세우자는 제안을 했다. 문제는 미국 단체의 지부로 이름을 사용하고, 초청장 발급 대가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초청자는 반드시 한민족복지재단으로 표기하고, 초청장 발급비용은 지불할 수 없지만 대신 방북 시에 식량과 의약품을 전달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처음에는 북한이 완강하게 거부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우리 요구대로 초청장이 도착했다.

통일부에서는 한국단체 명의로 초청장이 온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첫 방북단은 나와 이성희(연동교회) 최홍준(호산나교회) 목사, 박종철 한국의료선교협회 회장, 강영일 주영백화점 회장 등 6명으로 구성됐다. 1997년 11월 4일 김포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중국 다롄을 경유해 옌지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1박 한 후에 육로로 이동했다. 두만강 다리를 건너 비포장도로를 3시간 정도 달리니 라진항이 나타났다. 서울에서 50㎞도 되지 않는 북한 땅을 밟는데 중국을 돌아오느라 27시간이나 걸렸다.

출입국사무소에서 검사를 하는데, X레이 검색대조차 없어서 세관원이 손으로 가방을 뒤적이다가 성경을 발견하고는 “이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성경책인데 여행 중에 읽으려고 가져왔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세관 검사서에 성경책이라고 기록하고 “나갈 때 꼭 가져가십시오”라고 당부했다.

두 번째 방북은 1998년 1월 20일 이뤄졌다. 그런데 그 전날이 대한(大寒)이어서 기온이 영하 15도나 되는 강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저녁예배를 마치고 장갑을 사러갔더니 백화점과 시장은 모두 폐점한 뒤였다. 하는 수 없이 이태원의 야시장을 찾았는데 한 할머니가 손수레에 장갑을 싣고 장사하고 있었다. 날씨가 워낙 추운 탓에 거리에 손님이라고는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처음에는 내 것만 살 생각이었는데 할머니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라진에서 만날 사람들의 떠는 모습이 떠올라 20켤레를 달라고 했다. 내 말에 할머니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무슨 장갑을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사요?” “내일 북한 가는데 선물하려고 그럽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큰 비닐봉지에 장갑을 주섬주섬 담기 시작했다. “이것 그 불쌍한 사람들 전해줘요. 돈은 안 받을게.” “아니, 할머니! 이렇게나 많이…” 집으로 돌아와 풀어보니 내가 산 것은 20켤레인데 할머니가 준 것은 30켤레나 돼 코끝이 찡했다.

다음 날 옌지공항에 내리니 쌓인 눈이 족히 30㎝는 돼보였다. 라진 바람은 정말로 ‘골이 빠개질 정도’였다. 할머니가 거저 준 장갑이 그들에게 안성맞춤의 선물이 됐다.

한국에서 온 다른 팀들도 만났다. 라진과학기술대학을 설립하기 위한 김진경 총장 일행과 두레농장을 만들기 위해서 온 김진홍 목사 일행이었다. 한국교회를 대표한 옌볜과기대(교육) 두레마을(영농) 한민족복지재단(보건의료)의 삼각편대가 각기 은사대로 사명을 띠고 찾아온 것이다. 나는 대북선교 사역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경이로운 섭리를 다시금 깨달았다. 먹이고(영농) 병 고치고(보건의료) 가르치는(교육) 것은 예수님이 사용하시던 절묘한 방법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