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정승훈] 국민 속으로 들어가라

입력 2017-01-18 17:57

기자생활 20여년 동안 정치부 기자로도 몇 년간 일했으니 박근혜 대통령과 얽힌 기억이 전혀 없지는 않다. 지난 몇 개월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지켜보며 스스로에게 ‘나는 취재 도중 왜 박 대통령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나’를 곱씹어봤다.

일하면서 박 대통령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했던 때가 2번 정도 있었다. 2010년 하반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국회를 출입하면서 여당인 한나라당을 담당했는데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었던 박 대통령을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런데 만나는 과정이 다른 의원과 사뭇 달랐다. 어느 날 아침 당시 박 대통령의 보좌관이었던 이정현 전 새누리당 대표가 “오후에 의원님을 뵐 수 있으니 와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전화를 걸어왔다. 강력한 차기 대권 후보임에도 대외활동이 많지 않아 직접 대면하기 어려웠던 그를 만날 수 있는 기회여서 망설임 없이 의원회관으로 갔다. 시간에 맞춰 가보니 다른 언론사 ‘여당 반장’(대개 각사의 여당 출입기자 중 최고참을 가리킨다)이 서너 명 와 있었다. 기자들이 몇 분 기다린 후에야 박 대통령은 등장했다.

기자가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 바쁘게 일하는 모습이나 소탈한 측면을 보여주려 하는 대다수 의원과는 퍽 다른, ‘3부 요인급’ 의전으로 느껴졌지만 문제의식을 더 발전시키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영애’로 살았고, 당대표를 역임한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려니 하고 지나쳤다. 박 대통령과 나눈 대화에 기사 쓸 거리가 없어 안타까웠던 기억만 또렷하게 남아 있다.

탐사기획팀에서 일하던 2011년에는 국내 언론 최초로 모든 국회의원의 정치자금 수입과 지출 내역을 전수 조사해 보도했다. 취재를 통해 분석한 방대한 양의 정보를 모두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독자들의 추가 취재 요청도 받았다. 독자들 중 가장 많은(13.1%) 이들이 박 대통령의 지출 내역을 더 상세히 보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탐사기획팀이 추가로 보도한 것은 박 대통령의 ‘호텔 정치’였다.

박 대통령은 2010년 한 해 동안 서울시내 12개 호텔의 비즈니스센터 대여료를 109회나 지불했다. 사흘에 한 번꼴로 호텔 비즈니스센터를 찾아 외부인사와 면담을 가졌다. 박 대통령은 삼성동 자택과 가까운 강남 지역 호텔들을 주로 찾았는데 가장 많이 이용한 곳은 역삼동 리츠칼튼 호텔이었다. 그랜드인터컨티넨탈 호텔과 코엑스인터컨티넨탈 호텔, 임페리얼팰리스 호텔, 라마다서울 호텔 등도 10차례 이상 이용했다.

당시 취재에 응했던 이현우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박 대통령의 ‘호텔 정치’에 대해 “비공개 만남이 많아질수록 폐쇄정치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추가 취재를 통해 이를 경고하지 못했다.

‘그 정도 상황과 정보만으로 더 이상 뭘 할 수 있었겠나’라고 애써 위로해 보지만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는다.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의 밀실 정치와 폐쇄적인 소통 방식 등에 대해 제대로 지적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다. 권력자와 권력기관을 향해 날을 세우고 있어야 했는데 무뎌진 펜촉을 들고만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조기 대선이 가시화되면서 많은 주자들이 차기 대권을 노리고 열심히 뛰고 있다. 미리 정해진 공간에서, 미리 정해진 사람들과, 미리 맞춰진 각본에 따른 모습만 보여줘서는 국민의 마음을 얻기 어렵다. 다소 잡음이 생기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들이 발생한다 해도 국민들 속에서 거리낌 없이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차기 지도자에게 퍽 중요한 덕목임을 되새기게 되는 요즘이다.

정승훈 온라인뉴스부장 s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