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형석 <4> 北 잠수함 발견되자 사무실에 돌 날아와

입력 2017-01-18 20:26
유엔경제사회이사회(ECOSOC)가 2007년 7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주최한 제1회 국제혁신박람회에서 반기문 당시 유엔사무총장(왼쪽 세 번째)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필자(왼쪽 두 번째).

‘사랑의 쌀 보내기’ 기쁨도 잠시뿐 다음 날 강릉 앞바다에 무장공비를 태운 잠수함이 발견됐다. 우리민족서로돕기 사무실은 밖에서 돌이 날아올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했다. 그 와중에 박세록 장로로부터 기존의 한민족통일준비모임을 재건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당초 내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사무총장을 맡았을 때 박 장로와 서경석 목사의 면담을 주선해 한민족통일준비모임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틀 안에서 운영하기로 하고, 박 장로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미주 총재로 위촉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박 장로가 돌연 사임을 통보하며 내게 한민족통일준비모임에만 전념해줄 것을 부탁했다.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한 것은 6대 종단이 참여했기에 선교 비전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결국 4개월 만에 떠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을 나온 뒤로 정말 힘들었다. 홍문수 목사의 배려로 신반포교회 교육관에 딸린 작은 공간에 책상 두 개를 놓고 업무를 재개했으나 사무실을 유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수시로 기도원에 들어가 울부짖던 중 박은조 목사를 만났다.

1996년 11월 20일 오전 10시 연동교회에서 한민족복지재단 창립예배를 드렸다. 한국교회의 전통인 장·감(장로교와 감리교) 연합정신에 따라서 연동교회 이성희 목사를 법인이사장, 중앙교회 정영관 목사를 운영이사장으로 추대하고 박 목사가 상임이사를, 나는 사무총장을 맡았다. 새로운 단체가 순조롭게 발전하려면 하루속히 법인 인가를 받아야만 했다. 그렇지만 통일부는 법인 설립을 허가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통일부 대신 외무부(현 외교부)에 등록하는 것이었다.

이 목사가 제안한 아이디어는 적중했다. 법인등록 서류를 접수한 지 불과 3일 후인 1997년 2월 3일 재단법인 설립인가를 받았다. 당시는 몰랐지만 한민족복지재단이 후일 15개국에 지부를 설치하고 경제사회이사회에 특별협의지위를 얻게 되자 ‘외무부 등록 법인’이 얼마나 유용한지를 알게 됐다.

때로 하나님은 더 좋은 길로 인도하기 위해 우리의 걸음을 막으신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목사와 박 목사, 그리고 여성복회사 제림(JR)의 박초영 권사와 주영백화점 강영일 회장이 많은 금액의 선교헌금을 보내왔다.

한민족복지재단의 첫 프로젝트는 탈북자 정착을 돕는 자립형 농장(고향마을)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나는 두 명의 직원과 함께 이스라엘을 방문해 디아스포라들이 키부츠에 정착하는 과정을 살핀 후에 전북 장수군 장계면에 33만578㎡(10만평)의 부지를 구입했다. 이곳에 주택을 짓고 양계장과 양돈장을 만들며 사과나무를 심어 탈북자들의 정착을 도울 계획이었다. 재단 행정실장으로 일하던 하성민 목사는 가족을 데리고 탈북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신앙생활을 지도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같은 내용이 보도되자 주민들의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어쩔 수없이 부지를 장애인 자활농장인 벧엘농장에 넘기고, 강원도 홍천에서 농지를 임대해 옥수수 농사를 짓는 것으로 변경했다. 하 목사와 탈북자 4명이 함께 생활하면서 자활의 꿈을 다지는 가운데, 영화교회(손훈 목사)를 중심으로 한 후원회가 조직됐다. 그러나 ‘고향마을 꿈’은 실패하고 말았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