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스승이 필요해

입력 2017-01-17 17:22

호주에서 동양인이 운영하는 초밥집이 인기라는 말을 듣고 친구 하나는 일식 조리사 자격증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훗날을 도모하기 위한 준비였다. 누군가는 그렇게 요리를 배우고, 누군가는 피아노를 배우고, 누군가는 스페인어를 배운다. 대부분 마흔 살 전후 친구들이고, 이 중엔 인생 이모작이라든지 훗날의 도모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배움도 많다. 캘리그래피를 배우기 시작한 친구를 두고 주변인들은 그것이 어떤 형태로 가정경제에 도움을 줄 수 있는가를 이야기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친구가 원한 건 ‘보다 나은 필체’라는, 다소 소박한 목적이었다.

이런 배움 의지를 설명하려면 호기심 같은 단어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보다는 더 절실한 이유가 필요한데, 이를테면 어떤 ‘믿음’이랄까.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믿을 만한 투자처는 바로 ‘나’뿐이니까 말이다. 자격증처럼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나오는 게 아니라고 해도 내 몸과 지성은 그 배움을 기억한다. 나 역시 매해 새로운 것을 하나 이상 배우기로 결심했는데 생각나는 대로 올해의 목록을 만들고 보니 여행계획을 세운 것처럼 들떴다. 이 중에 하나라도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이런 시도가 영 무의미한 건 아니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건, 결심과 첫걸음만으로도 어느 정도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를 가르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일단 안심이 되는 일이다. 상대적으로 나는 배우는 사람, 아직 모르는 게 많은 사람, 많이 서툴러도 괜찮은 존재라는 이야기니까. 이렇게 서툴러도 괜찮은, 실수해도 괜찮은 위치에 놓이는 경우가 세상살이에서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배움의 효용이 하나 더 추가된다. 그것을 ‘위로’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마흔 전후의 사람들, 이미 학교는 졸업했고 사회에서도 신참은 아닌 사람들이 십 년 전보다 이십 년 전보다 능동적으로 스승을 찾는 건 그 이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실수해도 괜찮다고,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그런 위로가 덤으로 오기 때문에.

윤고은(소설가), 그래픽=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