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범(58·수감 중)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언론의 의혹 제기 직후인 지난해 10월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비선실세의 존재를 인정하자고 건의했다”고 16일 증언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해당 내용을 이후 대국민 담화 등에서 반영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이 SK 최태원 회장의 특별사면을 특정해 지시한 뒤 SK 측에 결과를 미리 알려주라고 지시한 정황도 드러났다.
이러한 내용들은 안 전 수석의 업무수첩에 ‘VIP(대통령을 칭하는 말) 면담’이라는 문구와 함께 빼곡히 적혀 있었다. 국회 소추위원 측은 증인신문 첫머리에 안 전 수석에게 수첩을 제시하며 “피청구인(박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들은 내용을 그대로 요약한 것이고, 나중에 추가한 건 없는 것이죠”라고 물었고, 안 전 수석은 “네”라고 답변했다. 소추위원 측은 앞서 검찰에 임의 제출된 안 전 수석의 업무수첩을 화상으로 제시하며 기억을 도우려 했다. 반면 박 대통령 측은 “수첩에 적힌 말 중 대통령의 말과 대통령이 만난 이의 말을 구별할 수 있느냐”는 등 증거능력에 대해 다른 시각을 제시했다.
박 대통령은 2015년 8월 8일쯤에는 안 전 수석에게 전화를 걸어 “재계 총수 중 사면을 생각해볼 수 있는 곳은 SK”라며 최 회장 사면을 먼저 얘기했다고 한다. 당시 박 대통령은 “다만 국민감정이 좋지 않으니 만일 사면이 되면 정당성을 확보할 게 뭐가 있는지 검토하라”고 지시했다고 안 전 수석은 검찰 조사에서 진술했다. 안 전 수석은 김창근 당시 SK이노베이션 회장에게 연락해 자료를 준비하라고 했다고도 앞서 검찰에서 밝혔다.
2015년 8월 13일 김 회장은 안 전 수석에게 ‘하늘같은 이 은혜를 잊지 않고 산업보국에 앞장서겠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안 전 수석은 “대통령이 SK 측에 최태원 특별사면 사실을 미리 알려주라고 해서 공식 발표 전에 김 회장에게 알려줬다”고 검찰에서 말했다. 이날 헌재에서는 “문자메시지를 봐서는 그랬던 것 같다”고 말했다.
안 전 수석은 문제의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 즈음 박 대통령으로부터 명칭과 임원진 명단 등을 받았다고 밝혔다. 안 전 수석이 이력서를 보고 개별적으로 임원진을 전화 접촉한 결과 대부분의 내정 당사자들은 내정 사실을 알고 있었고, 놀란 안 전 수석은 정호성(48·수감 중) 비서관에게 “비선실세가 지금도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헌법재판관들은 이날 안 전 수석의 건강을 걱정하면서도 미르·K스포츠재단과 관련해 날카로운 질문을 이어갔다. 서기석 재판관은 “통상의 재단법인은 출연자가 이사를 선임하고 이사가 출연 재산을 가지고 운영한다”고 말했다. 이어 “두 재단을 보면 출연자들은 설립에서 끝을 내고 다른 사람이 운영하고, 향후 운영은 예산 지원을 받아 운영한다는 식으로 돼 있다”며 이례적 형태를 지적했다.
이진성 재판관은 중국 리커창 총리의 방한 시점을 전후해 재단 설립 논의가 급물살을 탄 배경을 두고 질문했다. 이 재판관은 “(한·중 문화 교류를) ‘재단으로 하자’는 사전 협의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왜 문화재단을 시급히 설립하자고 서두른 거냐”고 물었다. 안 전 수석은 “당시로서는 필요했다”는 말만 했다. 김이수 재판관은 “청와대 주도 공익재단을 만들 때 이사진 등 임원 검증은 어떻게 했느냐. 민정수석실을 통해 했느냐”고 질문했다. 안 전 수석은 “확인을 안 해봐서 모르겠다”고 답했다.
양민철 이경원 기자 listen@kmib.co.kr
안종범 전 수석 “비선실세 인정하라 건의… 朴 대통령이 거부”
입력 2017-01-16 18:04 수정 2017-01-17 0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