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형석 <2> 탈북 여학생 “南서 보낸 약품으로 콜레라 치료”

입력 2017-01-16 21:12 수정 2017-01-17 17:46
지난해 9월 부친 묘소를 국립 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하고 자녀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필자(가운데).

1995년 8월 4일, 나는 그 날의 일을 잊지 못한다. 대학교수의 길을 가던 나를 사역 현장으로 부르신 날이기 때문이다. 총신대 연구실로 미국의 박세록 장로에게서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김 교수님, 유엔 북한대표부 한시해 대사가 전화했는데 북한에 홍수로 수백만명 이재민이 발생했답니다. 콜레라와 장티푸스가 창궐하는데 속수무책입니다. 방치하면 수백만명이 죽을지도 모르니 약을 속히 구해달라는 요청입니다. 미국에선 약을 구할 수가 없어 네덜란드 제약회사에 10만 명분을 주문했는데 약값 8만달러를 월요일까지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날이 금요일이니 사흘 동안에 8만달러를 보내달라는 요청이다. 지금 생각하면 두 번밖에 만난 적이 없는 박세록 장로가 내게 부탁한 것도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내가 알겠노라 약속한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성령의 이끌림이었다. 내게 수백만명의 생명이 달려있다고 생각하니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기도하는 가운데 홍정길(남서울교회) 목사가 생각났고, 옥한흠(사랑의교회) 하용조(온누리교회) 목사님께도 도움을 요청했다. 월요일이 되자 남서울교회와 사랑의교회, 온누리교회에서 2만달러씩 보내오고, 부족한 2만달러는 이랜드 박성수 회장이 보탰다. 이렇게 의약품이 마련돼 북한으로 보내졌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2008년 10월 19일 ‘평화한국’이 주최한 청년아카데미가 사랑의교회 반석채플에서 열렸다. 내가 특강을 마칠 무렵에 북한선교를 언급하면서 그때 얘기를 꺼내자 제일 앞자리에 앉아 있던 한 여학생이 안절부절못하며 갑자기 손을 들고 “목사님, 저요”하고 소리쳤다. “무슨 일인데”하고 물으니, “그때 제가 살아났잖아요”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1997년에 탈북해 연세대 법대 4학년에 재학 중인 허태경이라고 했다.

“1995년 여름 콜레라가 창궐해 평양에도 환자가 넘쳐났습니다. 김책종합대학 학생이던 나도 열병으로 중구역 병원으로 업혀갔는데 병실은 물론 복도에도 환자들이 가득 누워 있었습니다. 고열로 죽어가던 나는 외국에서 보내온 수액주사를 13개나 맞고 기적적으로 살았습니다. 이제 내가 어떻게 살아나게 됐는지 알았으니 남은 인생은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살아 있는 간증이었다. 우리가 선을 행하면 통일 후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탈북자를 통해서 간증을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하시니라”(눅 19:40)라는 말처럼, 북한이 아무리 강력하게 통제하며 숨기려 해도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이다. 생각해보면 1995년의 ‘큰물 피해’는 수많은 북한주민의 생명을 앗아간 엄청난 재앙이지만, 그렇게 절박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과연 한국교회에 문을 열었겠는가 하는 점에서 ‘고난은 구원의 통로’라는 말씀이 마음에 다가왔다.

아무튼 그 사건 이후 하나님은 나를 사역의 현장으로 부르셨다. 결국 나는 100여 차례 북한을 출입하는 가운데 남모를 시련과 은혜를 반복하면서 많은 부침을 겪었다. 2009년 사역을 다 내려놓고 개척교회 목사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하나님은 J일보와 C일보라는 세상 매체를 통해 북한을 돕는 사역 현장으로 다시 부르셨다. 그곳에서 4년 동안 다양한 경험을 쌓게 한 후에 드디어 지난해 말부터 한국통일선교연합을 섬기며 국민일보와 함께 복음통일을 준비하는 마지막 사명의 길로 인도하셨다. 강원도 양양 남대천을 떠난 연어가 다시 회귀하는 것처럼…. 정리=윤중식 기자